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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3400390
한자 六二五戰爭
영어의미역 Korean War
이칭/별칭 한국 전쟁,6·25 사변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경상남도 하동군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장상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950년 7월 25일연표보기
종결 시기/일시 1950년 9월 28일연표보기
성격 전쟁
관련 인물/단체 방호산|이응준|민기식|채병덕|김용제

[정의]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이 남침하여 경상남도 하동군을 포함한 한국 전역에서 일어난 전쟁.

[개설]

6·25 사변이라고도 하며, 국제적으로는 한국전쟁(韓國戰爭)[Korean War, 일부에서는 Korean Civil War라고 주장하기도 함]이라고 한다. 1953년 7월 27일 휴전 협정이 조인되었고, 현재까지 휴전선에 의해 남북이 분단된 채 휴전 상태가 지속되고 있다.

[경과]

1950년 6월 25일 6·25 전쟁이 일어나 한반도는 동족상잔의 비극을 맞게 되었다. 6·25 전쟁 발발 후 20여 일이 지난 7월 10일경부터 하동에는 서울 등지에서 온 피난민들이 도착하였다. 방호산(方虎山)을 사단장으로 한 인민군 제6사단은 중공군 출신자들로 구성된 정예 부대로서 7월 20일에 전주를 점령하고, 7월 23일에 광주, 7월 25일에 순천에 이어 하동까지 점령하였다.

7월 26일 영남 편성 관구 사령관으로서 이응준(李應俊) 소장 부대와 민기식(閔機植) 대령 부대를 통합 지휘하게 된 전 육군 참모 총장 채병덕(蔡秉德)은 하동 방면의 인민군을 저지하기 위해 1개 중대를 직접 지휘하고 김용제 중령이 지휘하던 다른 1개 중대를 통합하여 하동으로 진출하였다. 미군 29연대 3대대도 채병덕 부대와 함께 하동으로 전진하였다.

7월 27일 아침 미군 29연대 3대대는 쇠재[牛峙]에서 적의 기습 공격을 받았다. 불의의 기습을 받은 미군 부대는 60% 이상의 병력과 모든 중장비를 잃고 후퇴하였다. 이날의 전투에서 채병덕은 제일선에서 진두지휘를 하던 중 인민군의 총탄에 맞아 전사하였다. 미군 50여 명이 포로로 잡혔다가 33명은 탈출하였다. 미국 측은 7월 28일 인민군의 공격 속도를 늦추기 위해 섬진교를 폭파하였다.

하동경찰서를 점령한 인민군들은 7월 26일 새벽 3시경 유치장을 개방하고, 체포 구금되어 있던 좌익 사상범들을 모두 석방하였다. 북한 인민군은 남한 점령 직후 혁명 정책을 수행할 조직적 기반을 마련하기 위하여 당과 사회단체 및 정권 기관인 인민 위원회를 구축하였다. 의용군 모집, 강제 노역 징발, 반동 인사 색출과 우익 인사 살해를 자행하였다. 반공에 앞장섰던 대한청년단 간부와 이승만(李承晩)의 정치 노선을 지지하였던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요인, 경찰 가족 등이 큰 피해를 입어 무려 168명의 우익 인사가 살해된 것으로 알려졌다.

북한 내각은 1950년 7월 4일 최고인민회의 상임 위원회에서 토지 개혁에 관한 정령을 발표하였고, 이어서 ‘공화국 남반부 지역에 토지 개혁을 실시함에 관한 정령 시행 세칙’을 공표하였다. 몰수 대상 토지는 미국과 이승만 정부 및 그의 기관들이 소유하고 있는 토지, 조선인 지주의 소유 토지 등이었다. 토지 분배를 받는 것은 고용 농민, 토지 없는 농민, 토지가 적은 농민으로서 무상 몰수, 무상 분배, 그리고 노동 능력별 분배 원칙이었다.

한편, 지주 토지 매입 대금 및 토지와 관계되는 모든 농민들의 부채가 폐지되었다. 경찰·군인·관료·지주, 그리고 우익 청년 단원 등 좌익 탄압에 앞장섰던 사람에 대해서는 정치적 숙청과 함께 재산 몰수를 병행하였는데, 토지 개혁 정령과 시행 규칙이 근거 법규였다. 그리고 7월 9일의 ‘농지 현물세에 관한 내각 결정’에 따라 8월 18일에는 세부 사항을 명시한 결정서를 공고하고, 세금 수납을 위해 서숙·메밀 등 잡곡까지도 낱알을 세어 농민들의 불만을 샀다.

북한 측은 또 전쟁의 승리를 위한 전선 원호 정책으로 의용군을 모집하였다. 인민군 점령 후 북한 측이 실시한 점령 정책은 주민의 장악과 당면한 전쟁의 승리에 모든 초점을 맞추어 지나치게 조급하게 추진됨으로써 강제성을 띠게 되었고, 남쪽 주민들에게 부정적 태도를 유발하였다.

[결과]

1950년 9월 28일 인민군이 지배한 지 63일 만에 수도 서울을 탈환하는 바로 그날 하동 역시 수복되었다. 인민군은 퇴각하면서 많은 우익 인사들을 납치해 갔다. 국민회 하동군지부장 여경엽 등 간부 박재겸, 정재기, 신무열, 하동읍장 김재일, 대한청년단 간부 중주룡 등 77명을 화개면 창고에 가두었고, 같이 잡혀갔던 경찰 간부 정형규 경사를 밤중에 섬진강 변 화개나루 근처에서 총살하였다. 화개 주민들의 기지로 인민군에게 술을 먹인 후 틈을 내어 김정환이 창고 문을 열어 감금된 인사 77명이 모두 살아서 탈출하였다. 후퇴하던 인민군의 다수가 지리산으로 잠입, 빨치산으로 변해 휴전 협정이 맺어진 이후까지 활동하였다.

[의의와 평가]

6·25 전쟁은 민족의 큰 비극이었다. 6·25 전쟁의 결과 냉전 질서가 남북한 모두를 지배하였다. 6·25 전쟁의 결과 남북한의 관계는 더욱 적대적으로 변하였고, 민족 분단은 고착되었다. 평화 통일을 요구하는 다수 국민들의 소망은 힘을 가질 수 없었다. 대신 북한 지배 세력에 대한 증오와 대결 의식만이 부추겨졌다. 이것은 북한의 전쟁을 통한 자주적 통일 국가 수립 기도가 무모한 것이었음을 간접적으로 증명하는 것이다.

또 6·25 전쟁을 계기로 남한 내의 민중 운동과 민주 세력은 괴멸적 타격을 받았고 한국 사회는 독재 체제가 구조화되었다. 전쟁 이후 남한 내 좌익 세력은 정치적으로 소멸하였다. 또한 남북 협상파도 전쟁 과정에서 월북하였거나 납북되어 남한 내 좌파, 혹은 중간파 세력은 대부분 제거되고 전후 전치지형은 보수 우익 진영 내의 대립으로 축소되었다.

[참고문헌]
이용자 의견
이** 6/25 수정요청을 하였는데 약 한 달이 넘도록 답변이나 수정 사항이 없습니다.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 답변
  •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을 이용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비정상적 민원 제기로 처리가 지연되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2020.07.24
이** 하동 전투(1950.07.25.~1950.07.27.)에는 미군 제24사단, 민부대 30연대, 북한군 제4, 6사단이 참여하였습니다.
  • 답변
  •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을 이용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기하신 의견에 관한 자료를 보내주시면 검토후 반영하겠습니다. 앞으로도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2020.06.25
관** "김상원" 님의 글은 서비스 정책에 맞지 않아 삭제되었습니다. 2014.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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