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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3401119
한자 眞鑑禪師慧昭
영어의미역 Buddhist Monk Jingam, Hyeso
이칭/별칭 진감국사
분야 종교/불교,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종교인
지역 경상남도 하동군
시대 고대/남북국 시대/통일 신라
집필자 곽승훈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774년연표보기
출가|서품 시기/일시 804년연표보기
몰년 시기/일시 850년연표보기
출생지 전라북도 익산시 금마면
성격 승려
성별
대표 경력 국사

[정의]

남북국 시대 하동 지역에서 활동한 선종의 고승.

[개설]

진감선사 혜소는 804년(애장왕 5) 당나라에 들어가 창주(滄州)의 신감대사(神鑒大師)에게 출가하였다. 이후 10년 동안 중국에서 공부하다 830년(흥덕왕 5) 귀국하여 상주와 지리산 등지에서 남종선(南宗禪)과 범패 음악을 널리 전하여 선종 사상에 큰 영향을 끼쳤다.

[활동 사항]

진감선사 혜소의 성은 최씨이다. 선조는 한족(漢族)으로 산동(山東)의 고관이었다. 고구려를 공격하던 수나라가 을지문덕 장군에게 격퇴됐을 당시 고구려로 망명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처음에는 고구려에 정착했을 것으로 추정되나, 훗날 전주 금마[현 전라북도 익산]에 정착하였다. 아버지는 최창원(崔昌元)으로 독실한 불교 거사였다. 어머니는 고씨(顧氏)로, 서역의 승려가 나타나 아들이 되기를 원한다고 말한 꿈을 꾼 뒤 진감선사 혜소를 임신했다고 전한다.

774년(혜공왕 10) 전라북도 전주 금마에서 태어난 진감선사 혜소는, 804년(애장왕 5) 30세의 나이에 당나라로 가는 사신의 배에 뱃사공을 청하여 들어갔고, 이후 창주로 가서 신감대사에게 출가하였다. 810년(헌덕왕 2) 숭산(崇山)의 소림사(小林寺)에서 구족계(具足戒)를 받고, 종남산에 들어가 지관(止觀)을 닦았다. 830년(흥덕왕 5) 신라에 돌아와 경상북도 상주 장백사(長栢寺)[현 칠장사]에 머물며 중생을 교화하였다. 얼마 뒤 지리산 화개곡으로 옮겨 삼법화상(三法和尙)이 창건한 옛 절터에 새로 절을 짓고 머물렀다.

이후 명성이 널리 알려지자 838년(민애왕 원년) 민애왕이 만나기를 청하였으나 왕에게 선정에 힘쓰라고 하면서 만남을 거절하였다. 이에 왕이 부끄러움을 느끼고 사신을 보내 선사에게 혜조(慧照)라는 호를 내려주었다. 뒤에 소성왕의 이름을 피해 ‘조(照)’를 ‘소(昭)’로 고쳐 혜소라 하였다. 또한 황룡사의 승적에 올리고 서울[현 경주]에 와서 머물 것을 청하였으나 거절하였다.

진감선사 혜소는 가르침을 받고자 따르는 사람이 늘어나 절이 비좁게 되자, 다시 화개의 남쪽 기슭에 옥천사[현 지리산 쌍계사]를 짓고, 조계(曹溪)의 현손으로서 혜능(慧能)의 영당(影堂)을 세웠다. 850년(문성왕 12) 나이 76세, 법랍 41세로 입적하였다.

[사상과 저술]

진감선사 혜소는 심법(心法)을 강조했는데, 그것은 이름을 붙일 수도 설명할 수도 없는 것이었다. 즉 전하지 않으면서도 전해지는 남종선 사상이었다. 전하지 않았으나 전해지고, 말하지 않았으나 마음속에 새겨지게 하는 혜소의 선종 사상은 달을 가리키는 비유로 곧잘 설명된다. 손가락으로 달을 가리키지만 달은 물론 가리키는 손가락마저도 잊어버리게 된다. 이렇듯 혜소는 기본적으로 강한 조사선 사상을 견지하고 있었다.

진감선사 혜소는 신라로 돌아오면서 “비록 공관(空觀)을 추구했지만 어찌 근본을 잊겠는가.”라고 하였다. 이는 귀국 전 중국의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수행한 과정을 공관을 추구한 것으로 비유한 것이며, 근본을 잊지 않으려 귀국을 한다는 뜻이지만 수행하는 주체로서의 마음을 내세우려는 의도도 지닌 것이다.

진감선사 혜소는 입적에 임하여 제자들에게 “만법이 모두 공(空)하니 나는 장차 떠나려 한다. 너희들은 일심(一心)을 근본으로 삼아 힘써 노력하라.”고 하였다. 이는 그가 공관을 추구하면서도 일심을 근본으로 삼아 노력할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자기 마음속에서 불성을 찾아 깨치려는 조사선 사상은 생활 자체를 스스로 꾸려 가는 실천 수행을 강조하였다. 문인들이 거친 음식을 공양하게 되어 곤란해 하자, 진감선사 혜소가 “마음이 여기에 왔으니 거친 밥인들 상관없다.”고 말한 것이 그 예이다. 또한 그는 어린이나 어른은 물론 지위의 높고 낮음을 가리지 않고 한결같이 대하였다. 이같이 그의 조사선사상 속에 일심이 강조되어 자리하는 모습은 북종선도 함께 융섭되었음을 의미한다. 이처럼 혜소의 남종선 사상은 북종선 사상을 포용하면서 형성되었으며, ‘일심’을 근본으로 삼아 강조되었다.

진감선사 혜소는 범패를 전하여 소리로써 교화하였는데, 이후 범패는 신라 선종계는 물론 한국 불교계에 유행하는 영향을 주었다. 또 중국으로부터 차나무를 들여 와 지리산 일대에 재배하였다고도 전한다.

진감선사는 수백 명의 제자를 길렀는데, 그 중 법량(法諒)이 가장 뛰어났다고 전한다. 산문은 나말려초 여러 선문 가운데 하나로 발전하지 않았으나, 뒤에 북종선 계통인 희양산문(曦陽山門)의 정진(靜眞) 긍양(兢讓)진감선사 혜소의 증손 제자로 일컫는 사실에서 미루어 신라 말의 선종 사상계에 일정 부분 영향을 주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섬진강에서 뛰노는 물고기를 바라보고 지은 「어산팔영(魚山八詠)」 8수가 있었다고 하나 내용은 전하지 않는다.

[묘소]

탑을 만들거나 비를 새기지 말라는 유언에 따라 부도를 따로 제작하지 않았는지 어디에서도 부도를 확인하기 어렵다.

[상훈과 추모]

진감선사 혜소가 열반에 든 것은 850년으로, 처음 문성왕이 시호를 내리려 하였으나 탑비를 세우지 말도록 유언을 남겼다는 소식을 접하고 그만두었다. 그 후 36년이 지난 뒤 문인들이 선사의 가르침을 잃을까 염려하여 내공봉 양진방(楊晉方)과 숭문대 정순일(鄭詢一)에게 돌에 새길 것을 청하였다. 이에 헌강왕이 시호를 진감선사(眞鑑禪師), 탑명을 ‘대공영탑(大空靈塔)’이라 하고 탑비를 세우도록 하였다. 헌강왕이 중도에 승하하자 정강왕이 이를 계승하면서 양쪽 계곡의 시냇물이 합쳐 흐른다고 하여 옥천사에 ‘쌍계사’란 이름을 내렸다. 탑비는 887년 7월에 세워졌는데, 이 달에 정강왕이 승하하였다. 신라 후기의 대문장가인 최치원(崔致遠)이 비문을 지었으며, 글씨도 직접 썼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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