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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동 두치장 괘서의 변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3401124
한자 河東斗峙場掛書-變
영어의미역 The Pleading of a Writing on the Wall in Hadong Duchijang Market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경상남도 하동군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김준형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801년 6월 16일연표보기
성격 괘서 사건
관련 인물/단체 전지효|이진화|배진경|배윤경

[정의]

조선 후기 경상남도 하동군 두치장(斗峙場)에 괘서가 내걸린 사건.

[역사적 배경]

조선 후기 사회 변화 속에서 사회를 개변시키거나 조정을 뒤엎으려는 세력들에 의해 여러 가지 비기(秘記)·도참설(圖讖說)이 나오고 있었다. 그리하여 이런 설을 퍼뜨리면서 세력을 규합하여 변란을 일으키려는 세력들도 등장하였다. 예부터 삼신산(三神山)의 하나로 알려져 있는 지리산은 종종 이에 이용되었는데, 하동은 지리산 남쪽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리고 섬진강 하류 동쪽 언덕에 있는 두치장은 하동부(河東府) 관아에서 5리쯤 떨어진 곳에 위치하여, 영남과 호남의 사람들이 크게 모이는 대도회지였다. 매번 장날이 되면 섬에서 온 수백 척의 배가 해산물을 싣고 섬진강을 거슬러 올라오고, 강에서 내려온 배 10여 척은 육지에서 난 물산을 포장하여 강을 따라 내려와 긴 언덕에 줄지어 정박하였다고 한다. 두치장이 이와 같이 번화한 곳이었기 때문에, 일부 변란 세력은 장날을 이용해 많은 사람들을 선동하려는 사례가 적지 않았다.

[경과]

경상남도 의령군 칠곡면 막근동에 사는 전지효(田志孝)가 진주에 사는 매형 이진화(李鎭和)를 시켜 두치장에 괘서를 걸게 하였고, 또 자신이 사는 마을 근처 배동률(裵東律)의 집문 밖의 마전(麻田)에도 걸어두었다가 이진화에게 걷어오게 해서, 면 집강(執綱)으로 하여금 관에 신고하게 하였다.

그리고 매형 배진경(裵縉慶)으로 하여금 흉서를 쓰게 하여, 배진경의 동생 배윤경(裵綸慶)을 보내어 창원에도 게시하게 하였다. 이 사실이 6월 16일 하동부사 허즙(許濈)의 급보에 의해 감영에 알려지고, 경상감사의 밀계에 따라 조정에 알려졌다. 조정에서는 안핵사까지 파견하여 이 일을 조사하였다.

괘서는 흰 명주(明紬)를 한 자[尺] 남짓하게 대나무 장대에 종이 끈으로 꿰뚫어서 매단 형태였는데, 명주 가운데에 “문무(文武)의 재예(才藝)가 있어도 권세가 없어 실업(失業)한 자는 나의 고취(鼓吹)에 응하고 나의 창의(倡義)에 따르라. 정승이 될 만한 자는 정승을 시킬 것이고 장수가 될 만한 자는 장수를 시킬 것이며, 가난한 자는 풍족하게 해주고 두려워하는 자는 숨겨 준다.” 라고 쓰여 있었다. 그 나머지는 진서(眞書)와 언문(諺文)을 서로 뒤섞어 난잡하게 쓰다가 지워 버렸다.

조사가 진행되면서 여러 지역에서 이와 관련된 연루자가 나왔다. 의령과 창원에서도 괘서에 대한 보고가 올라왔다. 또한 조사 과정에서 이에 간접적으로 연결된 이호춘(李好春)이 거론되었다. 그는 본래 영산(靈山) 사람으로서 점괘(占卦)에 나타나는 말을 풀이하여 허풍을 치며 남을 선동하는 요망한 말을 많이 하고 다녔다고 한다.

[결과]

조사 결과 이를 주도한 범인들이 밝혀졌다. 요언(妖言)으로 선동한 자는 이호춘이고, 흉모(凶謀)의 주장자(主張者)는 전지효라 해서 이 두 사람은 대역부도지율(大逆不道之律)로 처리하였다. 또한 이에 깊이 간여했던 이진화·배진경·배윤경은 범상부도(犯上不道)의 죄에 처하였다. 이외에 표명두(表命斗)·전재직(田載稷)·최광한(崔光漢)·이방실(李邦實)·정광선(鄭光善)·금맹용(金孟用)·정철손(鄭哲孫)·강응일(姜膺一)·권정식(權正式)·조영(趙纓)·조재우(趙再愚)·박형원(朴馨遠)·배여경(裵汝慶) 등 상당수 사람들이 하동 두치장 괘서의 변에 연루되어 처벌받은 것으로 보인다.

[의의와 평가]

조선 후기 사회 변화 속에서 일부 몰락한 양반층의 불만이나 농민 등 민중 세력의 사회 변혁이나 국가에 대한 저항의 희망을 담아내는 비기·참서류 등이 많이 나돌았다. 이런 것들은 자주 사람들을 선동하는 형태로 나타났다. 이 사건은 비록 작은 소동으로 끝나기는 했지만, 그 뒤에도 이런 종류의 일들이 계속 이어지고, 급기야는 1862년 진주에서 시작되어 전국으로 확대되는 농민 항쟁으로 확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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