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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독립선언서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3401130
한자 大韓獨立宣言書
영어의미역 the Declaration for Korean Independence
이칭/별칭 하동독립선언서
분야 역사/근현대,문화유산/기록 유산
유형 문헌/문서
지역 경상남도 하동군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추경화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작성 시기/일시 1919년 2월 17일연표보기
발견|발굴처 경상남도 하동군 적량면 동산리 지도보기
성격 문서|독립선언서
관련 인물 박치화|정낙영|이범호
용도 독립 선언 선포
발급자 박치화

[정의]

3·1 운동 당시 경상남도 하동의 독립운동가들이 제작, 배포한 독립 선언서.

[개설]

대한독립선언서는 일명 하동독립선언서라고도 불리는데, 하동 지역 인사 12명의 이름으로 작성되어 3·1 운동 당시 하동군 내에 배포된 것으로 추정된다. 지금까지 전해 오는 것은 한 장뿐인데, 독립운동가 박치화(朴致和)가 살던 하동군 적량면 동산리 고택 처마 밑에서 우연히 발견되었다.

[제작 발급 경위]

3·1 운동에 즈음하여 하동군민들의 독립 의지와 저항 의식을 보이기 위하여 제작하였다. 서울의 독립 선언서에 따르지 않고 독자적으로 작성, 배포하였으며, 독립운동가들의 사상과 나라에 대한 충성심을 짧으면서도 명쾌하게 밝히고 있다.

[형태]

한지에 붓으로 위에서 아래로 썼으며, 국한문 혼용이다. 항일 투사들의 이름이 한 줄에 4명씩 3줄에 걸쳐 12명이 등재되었다. 가로 31㎝, 세로 21㎝로 구성되었다. 세월이 오래 흐른 관계로 한쪽이 푸르게 변했으나 지금은 보존 처리를 거쳐 깨끗하게 보존·전시되고 있다.

[구성/내용]

대한독립선언서는 한 줄에 19~21자씩 15줄로 한자와 한글을 병기하였고 위에서 아래로 쓰는 방식을 취하였다. 조선이라 하지 않고 대한이라 했고, 민족자결주의를 내세우고 조선 개국이 아닌 단군 개국 4252년으로 기록하였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황천(皇天)이 주시고 신명(神明)이 도우사 세계 평화의 회의가 창개됨을 반(伴)하야 민족 자결의 여론이 병기하는 차호시운(此好時運)이 래(來)하였도다. 오호라 십개성상(十個星霜)을 타(他)의 기반하(羈絆下)에서 인통신음(忍痛呻吟)하던 우리 대한동포여 확호(確乎)한 정(精)을 려(勵)하야 신속히 수(手)를 착(着)하라. 시(時)가 래(來)하고 운(運)이 복(復)하얏네. 주저치 말며 관망치 말고 우리의 사업을 우리의 심력(心力)으로 자결 단행합시다. 아(我)의 심기설봉(心機舌鋒)은 타(他)의 장거포(長巨砲)보다 우승(優勝)하니 일심단체(一心團體)로 광복지(光復地)로 병향(幷向)합시다. 최후의 1인과 최후의 일각까지 폭동과 난거(亂擧)는 행치 말고 인도와 정의로 독립문으로 전진합시다. 어희라, 대한 광복과 동양 친목과 세계 평화가 금일로부터 실현되얏소. 분기(奮起)하고 맹진(猛進)하라. 우리 반만년 신성한 역사와 삼천리 금수의 강토를 유(有)한 우리 동포여. 단군 개국 4252년 2월 17일(음력) 박치화 정낙영 정인영 이성우 이범호 박종원 이병홍 정희근 김응택 이보순 황학성 김두순”

[의의와 평가]

박치화 등 12명이 작성·배포한 대한독립선언서는 하동군민들의 독립 의지와 저항 의식이 진솔하게 나타난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서울에서 천리나 떨어진 하동군에서 단독으로 독립 선언서를 작성했다는 것은 매우 획기적이고 놀라운 일로 평가될 수 있다. 대한독립선언서를 보관하고 있는 독립기념관 측에서 문화재로 지정받기 위해 신청했으나 보류된 바 있는데 다시 문화재 신청을 시도해 볼 가치가 있다.

[참고문헌]
이용자 의견
김*** 하동독립선언서에 참여한 김응택은 김 영기의 부친이자 김 원식의 조부이다. 김 응택은 중국 대련에서 독립운동 참며중에 체포되어 여순 감옥에 수감된후 고국 대구로 이송조치되어 재판에 넘겨졌다. 조부는 6.25 전쟁중 상가 조문길에 횡천면 남산리 원동부락에서 군용기 폭격으로 6월 18일(음력)에 별세하였다. 2016.1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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