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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노동공제회 하동지회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3401136
한자 朝鮮勞動共濟會河東支會
영어의미역 Chosun Labor Credit Union, Hadong Branch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지역 경상남도 하동군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김준형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설립 시기/일시 1922년연표보기
해체 시기/일시 1924년연표보기
성격 노동 단체
설립자 정태장(鄭泰璋) 등

[정의]

일제 강점기 경상남도 하동 지역에 있었던 조선노동공제회 소속 지회.

[개설]

조선노동공제회는 일제 치하에서 생존권을 위협받던 노동자·농민들이 권리 신장과 함께 일제 지배에 거부하는 투쟁을 전개한 민족 운동 단체로서의 성격을 지닌 노동 단체이다. 1920년 4월 서울에서 박중화(朴重華) 등에 의해 창립되었으며 조선 노동 사회의 지식 계발, 저축의 장려, 품성의 향상, 위생 향상, 환난 구제 및 직업 소개, 일반 노동 상황 조사 등 6개 항을 강령으로 채택하였다.

신문 배달부, 인력거꾼, 지게꾼, 물지게꾼 등의 자유노동자와 정미 공장, 인쇄 공장, 연초 공장 등의 공장 노동자 등 다양한 직종의 노동자와 소작 농민들까지 가입하였다. 결성 초기부터 개량주의적 노사 협조 단체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으나 창립 당시 678명이던 회원이 1920년 5월 27일 대구대회를 기점으로 전국적인 조직을 갖추게 되면서 1921년 3월에 이르러 전국적으로 1만 7259명으로 증가하였다.

[설립 목적]

조선노동공제회 하동지회는 하동 지역 노동자 농민의 생존권 개선 및 조직화를 위해 설립되었다.

[변천]

조선노동공제회 조직의 전국적 확산에 따라 진주에서도 강달영(姜達永), 조우제(趙佑濟) 등 진주 지역 활동가들에 의해 1922년 2월 29일 조선노동공제회 진주지회가 창립되었다. 조선노동공제회 하동지회도 이 영향을 받아 결성되었을 것으로 보이지만, 그것이 언제 창립되었는지는 자세히 알 수 없다.

다만 10월 15일 진주에 인접한 하동군 북천면 옥정리 강습소 광장에서 정태장(鄭泰璋) 등 20여 명의 발기로 조선노농공제회 진주지회 북천분회가 창립되었다는 것만 알 수 있다. 이 창립대회에는 박태홍(朴台弘), 조우제 등 조선노동공제회 진주지회의 인사들도 참여하여 격려하였다고 한다. 이 소식을 전한 『동아일보』의 기사에 「하동공제분회(河東共濟分會) 발회식(發會式)」이라는 제목을 단 것으로 보아 1922년 조선노동공제회 진주지회 북천분회가 조선노동공제회 하동분회로 곧바로 확대된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얼마 안 되어 조선노동공제회 하동분회는 새롭게 꾸려지게 된다. 즉 조선노동공제회가 개량주의적 성격을 띠고 있다는 비판을 받고 해체되면서 1924년에 전국적인 조직인 조선노농총동맹의 결성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이에 따라 하동 지역을 비롯한 지방 조직도 변화를 보였는데, 하동 지역에서는 1924년 4월 각 면에 노농회가 조직되고 이것이 다시 하동군 전체로 연합한 형태인 하동노농연합회의 창립으로 이어지면서 농민의 생존권을 위해 새로운 운동을 전개해 나갈 것을 천명하였다. 그러나 1920년대 후반 일제의 탄압으로 농민 단체의 활동이 점차 위축되면서 일부 조직이 지하화 되어 간 것으로 보인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농민의 소작 문제 해결 및 생존권 개선과 관련된 사업과 업무를 주요 목적으로 하였다. 농민들의 단결과 자각을 위해 수시로 농민들을 모아 강연회를 열고 가입자들을 늘려나갔다. 농민을 괴롭히는 악덕 지주를 조사하여 공론화하고, 전면에 나서서 지주나 동양척식주식회사와 교섭을 벌이는 업무를 수행하였다. 소작 쟁의와 관련하여 경찰의 개입을 차단하기 위해 사전에 경찰과 교섭하였다. 또한 일을 효율적으로 진행하기 위해 조직 내에 집행위원장, 서무부, 경리부, 교육부, 조사부 등을 두었다.

초기에는 자주 강연회를 열고 농민들이 노농회에 많이 가입하도록 하는 데 역점을 두었다. 그러다가 1924년부터 하동노농연합회로 바뀌면서 본격적으로 악한 지주를 조사하거나 동양 척식 주식회사의 소작료에 대한 반대 투쟁 등을 결의하기도 하였고, 소작 쟁의에 대한 농민들의 일치단결을 결의하기도 하였다. 이중 경찰 입회 하에 열린 6월 19일의 하동노농회 임시 총회가 주목된다.

이 회의에서는 당시 쟁의 중이던 동양 척식 주식회사와 기타 지주에게 소작권이 박탈된 토지 46두락에 대해 사실의 진상을 조사한 후 이의 해결을 집행 위원에게 일임할 것과, 하동군 하동면 일부에서 기존 악습이던 이모작(二毛作)의 소작료[牟穗]는 아예 폐지할 것을 결정하였다. 또한 동양척식주식회사의 농감(農監) 및 군내 각 동양척식주식회사 소작계장(小作契長)의 소작인 저축곡의 부정 보관 및 소비에 대해서도 상세히 조사하여 대책 마련을 결의하였다.

조직은 1924년 하동노농회의 제창으로 전군에 산재한 세포단체, 적량노농회, 북천노농회, 화개노농회, 횡천노농회, 진교노농회, 가옥(加玉)노농회, 하동노농회 등 8개 단체의 연합으로 구성되었다. 1926년 말 당시의 회원 총수가 3,000여 명이고, 수년간 소작 쟁의 수백 건을 해결하며 조선 소작쟁의사(小作爭議史) 상에 중대한 역할을 하였다. 이 운동을 이끈 대표적 인물은 조동혁, 김기완(金淇完) 등이었다.

[의의와 평가]

일제 강점기 생존권에 위협을 느끼던 노동자·농민들이 단결하여 그들의 권리를 신장하고, 나아가 일제의 지배에 거부하는 투쟁을 전개해 나간 민족 운동으로서 민족 해방 운동사에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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