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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청년회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3401138
한자 大同靑年會
영어의미역 Daedong Young Men's Association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지역 경상남도 하동군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장상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설립 시기/일시 1948년연표보기
해체 시기/일시 1953년연표보기
성격 청년 단체

[정의]

1948년부터 1953년까지 경상남도 하동 지역에 활동한 청년 단체.

[개설]

일제의 패망에 따른 행정 공백과 해방 후 좌우익 간의 격렬한 대립 속에서 군대와 경찰력이 부족한 가운데, 치안 유지 및 좌익 세력과의 투쟁에 청년 단체의 역할이 컸다. 9월 1일 이상경·여재규 등이 주축이 되어 대동청년회를 조직하였다. 회원 83명이 참여하여 군민을 대상으로 민중 계몽 운동을 전개하며 우리말과 우리 역사 되살리기 군민 교습을 시작하였다.

해방 직후 경상남도 지역의 주요 우익 청년 단체로 광복청년회를 들 수 있다. 광복청년회는 해방 직후부터 조직되었던 광복군 국내 지대 조직에 기반을 두었다. 1946년 4월 30일 중앙에서 광복군이 광복청년회로 전환하자 경상남도 각지도 경상남도 지방 광복청년회의 지부로 재발족하였다. 서부 경상남도의 광복청년회는 진주특별지회를 구심점으로 활동하였다.

1947년 9월에 이청천을 중심으로 대동청년단이 결성되었으며 난립된 청년 단체들을 통합 결성하여 반공과 단독 정부 수립을 주장하는 이승만의 정치 노선을 옹호하며 활동하였다. 하동의 대한청년단은 정준조[초대 단장], 이우봉[2대 단장] 등의 주도로 창립 결성되었으며, 각 읍면별로 읍면 청년단이 조직되어 범군민적 청년 단체로 급성장하였다.

[변천]

1948년 대동청년단이 대한청년단에 흡수 통합되면서 하동군 대동청년단도 대한청년단으로 개편되었다. 대한청년단은 1948년 10월에 이승만이 자신의 취약한 정치적 기반을 유지 강화하기 위해 조직한 우익 청년 단체다. 대동청년단, 조선민족청년단[이범석], 조선청년동맹[유진산], 국민회청년단, 대한독립청년단, 서북청년회 등을 합쳐 조직하였다. 대한청년단은 300만 단원을 확보하여 전국적 조직 체계를 갖춘 유일무이한 청년 단체가 되었지만 청년 단체로서의 독자적인 역할은 상실한 채 주로 이승만 지원 활동을 전개하였다.

1949년 대한청년단은 청년방위대라는 반(半)군사 조직으로 개편되었으며, 1951년 1·4 후퇴와 더불어 국민방위군[제2국민병]으로 재편되었다. 그러나 대한청년단은 국민 방위군 사건[20여 만 명의 국민방위군에게 배당되는 자금을 소수의 간부들이 착복한 사건]으로 인해 국민방위군이 해산되면서 활동이 침체되었고, 이어진 민병대의 창설과 더불어 1953년 9월에 이승만의 영으로 해산되었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하동군 대한청년단의 주된 활동은 향토 방위 활동이었다. 1948년 10월 여수·순천 사건 진압으로 퇴각하던 반란군들이 섬진강을 건너 화개면, 악양면, 하동읍, 청암면 방면으로 들어가 지리산으로 잠적할 것이라는 정보가 있었다. 이에 하동군 대한청년단은 1,500여 명의 단원을 긴급 소집하여 하동군 고전면 신방촌에서부터 섬진강을 따라 화개면 탑리까지 방어선을 구축하고 봉기군이 섬진강을 건너오지 못하도록 지켰다. 11월 15일에는 하동군 화개면 부춘리 앞 강변에서 도강을 시도하던 일부 봉기군을 발견하고, 경찰의 힘을 빌려 총격전을 전개하여 격퇴하면서 4명을 사살하였다. 봉기군은 하동 쪽으로는 도강하지 못하고 11월 18일 전라남도 구례군 간전면 앞의 섬진강을 건너 피아골로 숨어들었다.

[의의와 평가]

6·25 전쟁 중 대한청년단 기동대지리산 빨치산 토벌 작전에서 큰 역할을 하였다. 1961년 5·16 군사 정변 직후 하동 송림에 당시 순국했던 124명을 기리는 순국용사 충혼탑이 세워졌으며 1995년 갈마산 충혼 봉안각으로 옮겨졌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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