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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3401150
한자 朴永默
영어음역 Park Yeong Muk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경상남도 하동군 고전면 성천리 941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집필자 최숙향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81년 5월 5일연표보기
활동 시기/일시 1919년연표보기
몰년 시기/일시 1973년 12월 19일연표보기
추모 시기/일시 1977년연표보기
추모 시기/일시 1990년연표보기
출생지 경상남도 하동군 고전면 성천리 941 지도보기
경상남도 하동군 고전면 성천리 지소마을 지도보기
경상남도 하동군 고전면 고하리 배다리장터지도보기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정의]

일제 강점기 하동 출신의 독립운동가.

[개설]

박영묵(朴永默)은 같은 마을 사람인 이종인(李宗仁) 등과 함께 1919년 4월 6일 경상남도 하동군 고전면에 있는 배다리장터에서 만세 운동을 주도했다. 뒷날 일본 경찰이 마을을 포위하고 주동자를 찾자 스스로 주동자라고 외쳐 경성고등법원에서 2년 6개월 형을 받아 복역하였다.

[활동 사항]

박영묵의 본관은 밀양(密陽)으로, 1881년 5월 5일 지금의 경상남도 하동군 고전면 성천리 941번지에서 태어났다. 농민으로 천성이 강직하고 활달하여 불의를 보고는 참지 못하는 열혈남아(熱血男兒)였다고 전한다. 1919년 3월 독립운동의 불길이 전국으로 번져 경상남도 끝 하동 지역에도 확산되었다. 박영묵고전면금남면에 사는 이종인, 정상정(鄭相正), 추홍순, 정의용(鄭宜鎔) 등과 비밀 연계를 가지고 가까운 마을의 청장년들을 모았다. 그리고 서울의 민족 대표를 본받은 ‘하동의 33명’으로 비밀 결사를 조직하여 단체 이름을 오직 한 뜻, 한 가지, 한 몸처럼 뜻을 모아 투쟁한다는 결의에 따라 일신단(一身團)이라 하고, 생사를 같이하겠다고 서약하였다.

박영묵 등은 다른 지역보다 약간 늦은 4월 6일 배다리[일명 주교]에서 의거를 결행하기로 약속했다. 그리고 사전 준비로 동지 정재기(鄭在基)하동읍으로 보내 「독립선언서」를 구해 오도록 하였다. 정재기하동읍 내에서 「독립선언서」를 구하러 다니는 청년이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일본 경찰에 발각, 체포되었으나 일신단 조직을 발설하지 않았기 때문에 고전면 의거는 순조롭게 진행될 수 있었다.

1919년 4월 6일 오후 1시 40분, 박영묵은 장터에 마련된 단상에 큰 태극기를 갖고 올라가 의거와 취지를 설명하고, “대한 독립 만세!”를 세 번 외쳤다. 이에 호응하여 일신단원들이 태극기를 높이 들고 만세를 외치자 군중들이 일제히 호응하여 몰려들었다. 주교장[배다리장]은 잠깐 사이에 만세의 함성과 태극기의 물결로 흥분과 감격이 흘러넘쳤고, 남녀노소까지 동참하니 군중의 수가 점차 1천여 명이나 되었다.

이에 ‘불칼’이란 악질적인 별명의 소유자로 유명한 일본인 경찰과 조선인 순사 박도준(朴道俊), 헌병 세 명 등이 급하게 출동하여 시위를 제지하려고 하였다. 일신단원들은 날쌔게 달려들어 그들을 붙들어 총과 칼을 빼앗고 모자와 제복을 벗겨 버렸다. 그리고 빼앗은 총과 칼을 시장 바닥에 내리쳐서 사용할 수 없도록 내동댕이치고는, 반항하는 경찰관 한 명과 헌병 두 명에게 집단 폭행을 가해 부상을 입혔다. 그러나 급거 출동한 일본군 수비대에 의해 군중은 해산되었다.

다음날 헌병과 경찰들이 지소마을로 몰려왔다. 지소마을에서는 아녀자들을 산 속에 피신시키고 장정들이 모여 일본 경찰과 싸우려고 했으나, 박영묵이 헌병과 경찰이 다가서자 어제의 거사가 모두 네 명이 한 일이라며 자신들을 체포하라고 소리쳤다. 이후 5월 16일에 박영묵이종인, 정상정, 정의용 등과 함께 ‘소요 및 보안법 위반’이란 죄목으로 징역 2년 6월형을 언도받고 진주감옥에서 옥고를 치렀다.

[상훈과 추모]

1977년 대통령 표창,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1982년 3월 1일 일신단으로 활동했던 이들의 의로운 정신을 기리기 위해 하동군 고전면 성천리 지소마을삼일 독립운동 의거기념비가 세워졌고, 이들이 만세 운동을 벌였던 하동군 고전면 고하리 배다리장터에는 1985년 12월 30일 하동군 고전면민 만세 운동 기념비가 세워졌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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