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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3401278
한자 鄭汝昌
영어음역 Jeong Yeochang
이칭/별칭 백욱(白勗),일두(一蠹),수옹(睡翁),문헌(文獻)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경상남도 하동군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전병철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450년연표보기
활동 시기/일시 1498년연표보기
몰년 시기/일시 1504년연표보기
추모 시기/일시 1610년연표보기
묘소|단소 경상남도 함양군 수동면 우명리 승안산지도보기
성격 문신|유학자
성별
본관 하동
대표 관직 안음현감

[정의]

조선 전기 하동 출신의 문신이자 유학자.

[가계]

본관은 하동(河東). 자는 백욱(伯勗), 호는 일두(一蠹)·수옹(睡翁), 시호는 문헌(文獻)이며, 함양에서 출생하였다. 증조할아버지 정지의(鄭之義)는 고려 왕실의 족보 관리 기관장인 판종부시정(判宗簿寺正)을 역임하였다. 할아버지 정복주(鄭復周)는 고려 후기 벼슬이 판전농시사(判典農寺事)에 이르렀는데, 조선 건국 후 전라도 경력(全羅道經歷)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아버지 정육을(鄭六乙)은 1460년(세조 6) 평안북도의 의주부 통판을 역임하였으며, 1467년(세조 13) 병마우후로서 이시애(李施愛)의 난을 평정하다 전사하였다. 어머니는 경주 최씨(慶州 崔氏)이다.

[활동 사항]

정여창(鄭汝昌)[1450~1504]은 16세인 1465년(세조 11) 무렵 정종(定宗)의 아들 도평군(桃平君)의 막내딸과 결혼하였다. 22세 때인 1471년(성종 2) 역수학(曆數學)에 밝았던 율정(栗亭) 이관의(李寬義)를 찾아가 2년간 수학하였다. 그 후 3년 동안 특별한 스승 없이 지리산 기슭인 하동 악양에 들어가 경학과 성리학을 깊이 연구하였다. 정여창이 당시 사림의 영수로 유명한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의 문하에 들어간 것은 이러한 몇 년을 보내고 난 뒤인 1476년(성종 7)이 되어서였다.

점필재는 『소학(小學)』을 중시하며 실천 유학의 기풍을 진작시키고 있었는데, 정여창은 스승의 가르침을 받들어 자신의 몸을 닦고 다스리는 데에 힘쓰고 힘써 효를 실천하였다. 그리하여 점필재의 문하에 들어간 지 4년 후인 31세[1480년] 때, 유교 경전의 뜻에 밝고 행실이 훌륭한 선비를 천거하라는 왕명을 받은 성균관에서 첫 번째 인물로 보고하였다.

34세[1483]의 비교적 늦은 나이로 진사가 되어 홍문관 검열·세자시강원 설서·안음 현감 등을 역임하였다.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가 일어나 ‘장(杖) 100대에 3천 리 밖으로 내치는 죄’에 처해졌다. 그리하여 함경도 북부의 종성(鐘城)에서 9년간의 유배 생활을 시작하였는데, 유배지에서 배속 받은 관청의 화부(火夫) 노릇을 성실히 수행하면서 언행에 흐트러짐이 없었으며, 또한 배우러 오는 학생들을 가르치고 지도하였다. 이때 길러 낸 제자들로 이희증(李希曾)·고숭걸(高崇傑) 등이 있다. 9년 시한부의 유배 생활을 다 마치기도 전인1504년(연산군 10) 55세를 일기로 유배지 종성 땅에서 숨을 거두었는데, 이 해에 일어난 갑자사화에 연루되어 부관참시(剖棺斬屍) 되었다.

[학문과 저술]

무오사화가 일어나자, 정여창의 가족은 신변의 위험을 느껴 그의 저술들을 불태웠다고 한다. 이때 없어진 것으로 『용학주소(庸學註疏)』·『주객문답(主客問答)』·『진수잡저(進修雜著)』 등이 있다. 증손인 춘수당(春睡堂) 정수민(鄭秀民)이 남아 있는 글과 주변 사람들에게 자료를 수집하고, 한강(寒岡) 정구(鄭逑)가 정리하여 만든 『문헌공실기(文獻公實記)』가 있다.

그 뒤 1919년 간재(艮齋) 전우(田愚)[1841~1922]가 후손인 정환주(鄭煥周)가 모은 정여창의 시문과 경상북도 현풍의 곽효근(郭孝根)의 집에 보관되어 온 「이기설(理氣說)」·「선악천리설(善惡天理說)」·「입지론(立志論)」 등을 감수하여 문집을 간행하면서, 이전의 『문헌공실기』는 『일두선생유집(一蠹先生遺集)』으로 이름하고 새로이 간행한 것은 『일두선생속집(一蠹先生續集)』으로 이름하여 함께 발간하였다.

정여창은 하동 태생은 아니지만 악양의 산수를 사랑하여 악양에 은거하였다. 섬진강가에 대나무와 매화를 심고 여기에서 평생을 마치고자 하였다. 그의 문집에는 「악양」이라는 시가 실려있는데, 이는 1489년 김일손(金馹孫)과 함께 지리산을 유람하고 악양으로 돌아가면서 감회를 읊은 것이다. 시는 다음과 같다.

"풍포범범롱경유(風蒲泛泛弄輕柔)[부들 풀 바람을 맞아 가볍게 흔들리는데]/ 사월화개맥이추(四月花開麥已秋)[사월 화개에는 보리가 벌써 익었네]/ 간진두류천만첩(看盡頭流千萬疊)[두류산의 수많은 골짜기 모두 돌아보고]/ 고주우하대강류(孤舟又下大江流)[외로운 배로 또 큰 강을 내려오네]"

이는 현재의 성과에 만족하지 않고 더 크고 넓은 세계로 향하는 학문적 구도의 세계를 표현하고 있으며, 이후 악양을 지나 지리산에 오른 수많은 유학자들로 하여금 차운시를 남기게 하였다.

[묘소]

묘소는 경상남도 함양군 수동면 우명리 승안산(昇安山)에 있다.

[상훈과 추모]

정여창중종 대에 우의정에 증직되었으며, 1610년(광해군 2) 문묘에 종사되었다. 또한 나주의 경현서원(景賢書院), 상주의 도남서원(道南書院), 함양의 남계서원(藍溪書院), 합천의 이연서원(伊淵書院), 거창의 도산서원(道山書院), 종성의 종산서원(鍾山書院) 등에 제향되었다.정여창이 머물던 마을인 덕은리정여창이 거처하여 그 유덕이 갈무리되어 있는 곳이라 하여 덕이 숨은 곳 즉 ‘덕은(德隱)’이라 이름지었다 한다. 덕은리에는 정여창이 학문을 강론하던 악양정과 그를 추모하는 사당인 덕은사가 있다. 악양정 주위에는 현재에도 정여창이 사랑했다는 매화나무가 많이 자라고 있다. 또한 국립중앙박물관에는 유명한 산수화가 이징(李澄)정여창화개현 거처와 주변 형승을 그린 보물 제1046호 「화개현 구 장도」가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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