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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3401313
한자 鄭文孫
영어음역 Jeong Munson
이칭/별칭 광윤(光潤),모효재(慕孝齋)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경상남도 하동군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전병철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473년연표보기
몰년 시기/일시 1554년연표보기
묘소|단소 전라남도 나주시 모효동
성격 유학자
성별
본관 하동

[정의]

조선 전기 하동 정씨(河東鄭氏)의 후손이자 유학자.

[가계]

본관은 하동(河東). 자는 광윤(光胤), 호는 모효(慕孝). 선대는 하동 사람인데 중세(中世)에 전라남도 나주(羅州)로 이거하였다. 증조할아버지는 사헌부장령을 지낸 정희주(鄭希周)이며, 할아버지는 담양부교수(潭陽府敎授) 정의중(鄭宜仲)이고, 아버지는 수의부위(修義副尉) 정승서(鄭承敍)이다. 부인은 참군(參軍) 신계규(申季糾)의 딸인 평산 신씨(平山申氏)이며, 그 사이에 3남이 있다.

[활동 사항]

정문손(鄭文孫)[1473~1554]은 경의(經義)로 선발되어 성균관에 들어갔다. 1519년(중종 14)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나자, 태학생(太學生) 2백여 명이 궁문(宮門)을 밀치고 들어가 부르짖으면서 곡을 하고 상소를 올려 문정공(文正公) 조광조(趙光祖)의 원통함을 변호하였는데, 그 일을 주도한 인물이 정문손임붕(林鵬)이었다. 이 일로 성균관에서 쫓겨난 후 금강(錦江) 가에 집을 짓고 함께 축출된 11명과 소요하며 시를 읊조리고 노래하며 지냈는데, 서로 더불어 익힌 공부는 ‘양심을 보존하고 천성을 기르며 의리를 강명한다[存心養性講義明理]’는 여덟 글자였다.

천성이 지극히 효성스러워 6~7세에 이미 겨울에는 따뜻하게 여름에는 서늘하게 부모를 잘 섬겼고, 새로운 과일이 있으면 자기가 먹지 않고 품에 넣어 와서 부모에게 드렸다. 조금 장성하여 『소학(小學)』을 읽고서 더욱 부지런히 효행에 힘썼다. 나이가 이미 70~80세가 되었을 때도 부모를 사모하는 마음이 쇠하지 않았지 않았다. 아버지가 병들자 자신의 손가락을 베어 피를 드시게 하여 반년을 더 살게 하였고, 어머니가 병들자 그와 같이 피를 드시게 하여 3개월을 더 살게 하였다. 부모가 돌아가시자 3년 동안 시묘를 살았다.

[묘소]

묘소는 전라남도 나주시 모효동에 있다.

[상훈과 추모]

나라에서 정려를 내리고 복호(復戶)의 특혜를 주었다. 고을 사람들이 그가 살던 곳을 모효동(慕孝洞)이라 하고 그 집을 모효재(慕孝齋)라 하였다. 고봉(高峯) 기대승(奇大升)이 지은 「사마재연회시서(司馬齋宴會詩序)」는 모두 7백여 자인데, 정문손의 덕을 매우 자세히 기술하고 있다.

[참고문헌]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20.06.03 내용 추가 [활동 사항] 정문손(鄭文孫)->정문손(鄭文孫)[1473~1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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