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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보도연맹 사건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3401541
한자 國民保導聯盟事件
영어의미역 Protection and Guidance League, Hadong-gun Branch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경상남도 하동군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장상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사건

[정의]

1949년 6월 좌익 인물들을 전향시켜 별도로 관리하기 위해 경상남도 하동군을 비롯해 전국적으로 국민보도연맹을 조직한 사건.

[역사적 배경]

국민보도연맹[약칭 보도연맹 혹은 보련]은 이승만(李承晩) 정권이 정권 유지를 위해 고안해낸 좌익 포섭 단체였다. 조직 결성의 대외적 명목은 “개선의 여지가 있는 좌익 세력에게 전향의 기회를 주겠다”는 것이었지만 이승만 정권이 보련을 만든 진정한 목적은 좌익 세력의 보도(保導)[보호하여 지도함]라기 보다 ‘색출’에 있었으며, 반정부 세력을 단속, 통제하는 데 있었다. 1948년 8월 남한 단독 정부가 수립된 이후 극심한 사상 대립 속에서 이승만 정권은 정권 유지를 위해 특단의 조치가 필요하였으니 그 법적 장치로 「국가보안법」을 제정하고 이를 뒷받침할 기구로 국민보도연맹을 조직하였다.

[경과]

1949년 6월 5일 서울 중앙 본부가 결성되었고, 바로 전국적인 조직 작업이 시작되었다. 공안 검사와 대공 수사원들이 실무를 맡은 운영 협의회가 국민보도연맹 조직을 총괄하였다. 10월 18일에 공보처는 미군정 법령 제55호에 근거하여 남조선노동당[남로당], 근로인민당, 사회대중당 등 16개 정당과 남조선여성동맹, 조선청년총동맹, 전국농민조합총연맹 등 11개 사회단체에 대해 전격적으로 등록 취소를 단행하였다.

그 후 내무부와 법무부, 대한청년단 주도로 지방 조직이 만들어졌다. 경상남도 연맹은 11월 13일 발기 대회를 거쳐 11월 30일 부산에서 선포 대회가 개최되었다. 해방 후 인민 위원회 등에서 활동한 노백용이 도 연맹 간사장을 맡았다. 경상남도의 각 군에서는 11~12월에 걸쳐 국민보도연맹 촉진 위원회 내지 국민보도연맹 선포 대회가 열렸다.

국민보도연맹 설립 후 남로당이나 인공당 등 좌익 정당은 물론이고 민청, 농조 등 사회단체에 관여한 사람들까지 광범위하게 포섭해 나갔다. 자수 기간을 설정한 후 기간 내에 자수하는 모든 자에 대해서는 죄의 경중을 떠나 일체 과거를 묻지 않는 것은 물론, 직업까지 알선해 주는 등 철저한 신분 보장을 약속하였다.

11월 한 달을 좌익 세력 자수 기간으로 정하고 11월 30일 마감한 결과 전향자 수는 전국적으로 약 4만 명에 달하였다. 도 경찰국은 경상남도 자수자 수가 5,548명이라고 발표하였다. 합천 1,305명, 산청 1,224명으로 많고 하동은 134명으로 비교적 적은 편이었다.

[결과]

하동군에서는 6·25 전쟁 직전에 국민보도연맹 100여 명이 목숨을 잃은 것으로 추정된다. 다만 학살로 목숨을 잃은 사람은 국민보도연맹 간부들로 일반 맹원들은 화를 면하였다. 하동군 지역의 맹원 수는 3,000여 명에 달하였다. 11개 면이 있었으니 면당 평균 300여 명 정도였다.

국민보도연맹 하동군지부 간사장은 인민 위원회 위원장이었던 전영우이며, 진교면 이상백, 적량면 박지화, 양보면 정치용, 횡천면 송재웅, 금남면 전복인 등이 면 단위 지회장을 맡고 있었다. 학살 당시 하동경찰서 순경으로 사찰계 내근직을 맡고 있었던 조모 씨의 증언에 의하면 국민보도연맹 조직 당시 각 지서의 직원들을 경찰서로 불러들여 국민보도연맹 가입과 명부를 직접 작성하였는데 대략 3,000명이었다고 기억하고 있다. 책자 형태의 명부에는 이름과 주소, 과거 활동 경력 등이 기록되어 있었다.

6·25 전쟁이 터지고 보름만인 7월 10일쯤 맹원들을 소집하라는 지시가 경상남도 경찰국[현 경남지방 경찰청]으로부터 내려왔다. 그에 따라 하동군 간부를 비롯하여 11개 면에 있는 간부급 맹원들을 하동경찰서에 집결시켰다. 진주에서 온 특무대원들이 GMC 트럭 2대[1대에 대략 40명 정도 탈수 있었음]에 싣고 진주형무소로 데려갔다. 그러나 이들은 산청 인근 육십령에서 총살당하였다.

첫 번째 학살이 있고난 후 보름이 지나, 6·25 전쟁이 터지고 한 달 만인, 인민군이 하동에 진주하기 바로 전날인 7월 24일에 두 번째 학살이 있었다. 진주형무소로 끌려가지 않고 남아 있다가 이후 검속된 맹원들로 하동경찰서 유치장에 40~50명가량이 수감되어 있었다.

하동경찰서 경찰관들은 이들을 밤에 트럭에 실어 섬진강 건너 전라남도 광양시 진월면 백운산 끝자락인 매티재로 데려가 학살하였다. 매티재 현장은 지반이 온통 암석으로 구성되어 있어 매장은 불가능하여 시신들이 처참한 모습으로 방치되었고, 대부분 유족에 의해 수습되었다. 하동군의 전영우는 미리 달아나 목숨을 건졌다.

그는 남다른 처신술 덕에 학살이 있은 다음날 인민군이 하동을 점령하였을 때 하동군 인민위원회 위원장을 다시 맡아 활동하였으며, 국군이 하동을 재탈환하였을 때도 별 탈 없이 살았다. 하동 지역에 있던 실제 좌익들은 국민보도연맹에도 가입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일찌감치 지리산으로 도망쳤다. 목숨을 잃은 맹원들은 엄밀히 따져 좌익으로 보기 힘든 사람들이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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