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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3400329
한자 河東邑城
영어의미역 Fortress in Hadong-eup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유적(일반)
지역 경상남도 하동군 고전면 고하리 고하마을 산114-9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김준형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문화재 지정 일시 2004년 5월 31일연표보기 - 하동읍성 사적 제453호로 지정
문화재 지정 일시 2021년 11월 19일 - 하동읍성 사적 재지정
조성|건립 시기/일시 1417년연표보기
발굴 조사 시기/일시 2002년연표보기
발굴 조사 시기/일시 2003년연표보기
발굴 조사 시기/일시 2009년연표보기
현 소재지 하동군 고전면 고하리 고하마을 산 114-9 지도보기
성격 읍성
양식 석성|포곡식 산성
크기(높이, 길이, 둘레) 약 4m[높이]|308.79m 또는 386.06m[둘레]
면적 123,018㎡[37,213평]
문화재 지정번호 사적

[정의]

경상남도 하동군 고전면 고하리 고하마을에 있는 조선 전기 읍성.

[개설]

하동은 조선 후기 숙종 때까지는 현이라는 조그만 고을이었고, 관아가 있는 읍치(邑治)는 고현면[현재의 고전면] 고하리에 있었다. 현재 하동군 고전면 고하리를 둘러싸고 있는 양경산(陽慶山)의 정상부를 따라 축조된 성곽이 하동읍성(河東邑城)으로, 주변의 산석을 이용하여 쌓아 올렸다. 조선 시대 태종 때 만들어진 것으로, 임진왜란 때에는 진주에서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1562~1611] 군사 1,000여 명이 침입해 와서 방화와 약탈을 자행하였다고 한다.

[건립 경위]

남해안 일대는 여말 선초(麗末鮮初)를 거치면서 왜구의 잦은 침입에 시달리게 된다. 조선 전기에는 산성을 중심으로 왜구에 대한 방어를 하였으나, 1415년(태종 15)부터는 경상도·전라도·충청도를 중심으로 연해 읍성(沿海邑城)이 축조되기 시작하였다. 이는 왜구를 해안선에서 막아 백성을 보호하려는 적극적인 방어책으로 전환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특히 세종 때에는 남해안 주요 거점을 중심으로 연해 읍성이 축성되었다.

연해 읍성은 현재까지의 조사에 따르면 일정한 축조 법칙이 확인되는데, 성문은 동서남북에 두고 북문이 없는 것이 대부분이며, 문에 옹성이 설치된다. 또한 대부분의 읍성은 석성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 하동읍성 역시 이런 일련의 상황과 연계하여 축성된 연해 읍성 중 하나였다. 하동읍성은 하동의 핵심적인 곳인 관아와 부속 기관이 있는 하동현(河東縣)을 외적으로부터 지키기 위한 성으로서, 1417년(태종 17)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측된다.

[위치]

하동읍성하동군 고전면 고하리 고하마을에 위치한다. 양경산에서 남쪽으로 뻗어 내려오는 능선의 고위 평탄면을 따라 축조되어 있다. 멀리 남해 바다가 한눈에 들어오고, 금오산[849m]의 봉수를 바라볼 수 있는 위치에 있다. 앞으로는 구 하동현의 주요 하천이었던 주교천이 돌아서 들어왔다가 섬진강 쪽으로 흘러들어 가고 있다.

[형태]

면적은 12만 3018㎡[3만 7213평]이다. 축조 당시에는 성의 둘레가 1,019척[308.79m], 높이가 13척[약 4m]이었다고 한다. 성내에는 우물이 5개, 연못이 1개 있었다. 『문종실록(文宗實錄)』에는 ‘주위가 2,943척, 높이가 평지에는 8척, 높고 험한 곳은 7척이며, 여장(女墻)의 높이가 3척, 적대(敵臺)가 11개소인데 이 중 이미 쌓은 곳이 4개소이며, 문이 3개소에 옹성(擁城)이 있고, 해자는 없다’고 기록되어 있다.

북쪽 정상부에서 남쪽의 계곡부를 감싸는 포곡식(包谷式) 성의 형태를 띠며, 체성의 동쪽·서쪽·남쪽에 반원형 편문식 옹성을 설치하였고, 11개소의 방대상의 치성이 확인된다. 하동읍성의 규모와 축조 시기에 대한 기록은 문헌마다 다소 차이가 있다. 규모에 대한 차이는 용척(用尺)에 따른 차이로 생각되며,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이후 기록은 모두 그 내용을 그대로 옮긴 것으로 추측된다.

[현황]

하동읍성은 2004년 5월 31일 사적 제453호로 지정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사적으로 재지정되었다. 동벽과 남벽의 일부가 농로 개설과 경지 정리로 인해 심하게 훼손된 상태이고, 나머지 성벽 역시 지속적으로 훼손이 진행되고 있는 상황이다. 2011년 현재 북쪽의 정상부를 제외한 나머지는 와해되어 있는 곳이 많아 동서 방향 300m, 남북 방향 400m 정도가 남아 있다. 석축의 너비는 2~3m, 높이는 3~5m 정도이다. 하동군은 2002년과 2003년, 2009년 세 차례에 걸쳐 발굴·시굴 조사를 실시한 바 있다.

[의의와 평가]

1702년(숙종 28) 하동이 섬진강과 연해를 낀 중요한 관방이라 하여 진주의 일부 지역이 편입되고, 또 부로 승격되어 관아도 진답면[현재의 하동읍]으로 옮기면서 하동읍성은 읍성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하였다. 그러나 연해 읍성, 즉 산성으로서의 중요성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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