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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동 대곡리 조지서 묘비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3400385
한자 河東大谷里趙之瑞墓碑
영어의미역 Tombstone of Jo Jiseo in Daegok-ri, Hadong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비
지역 경상남도 하동군 옥종면 대곡리 614-2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박용국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관련 인물 생년 시기/일시 1454년연표보기
관련 인물 몰년 시기/일시 1504년연표보기
현 소재지 경상남도 하동군 옥종면 대곡리 614-2 지도보기
성격 묘비
관련 인물 조지서
재질 사암
소유자 임천 조씨 지족당공파 종중
관리자 임천 조씨 지족당공파 종중
문화재 지정 번호 경상남도 문화재 자료 제458호

[정의]

경상남도 하동군 옥종면 대곡리에 있는 조선 전기의 문신 조지서(趙之瑞)의 묘비.

[개설]

조지서[1454~1504]의 본관은 임천(林川)이며, 자는 백부(百符), 호는 지족정(知足亭) 또는 충헌(忠軒)이다. 증조부는 조익(趙益)이며, 조부는 직장(直長) 조민원(趙敏原)이다. 아버지는 사헌부감찰 조찬(趙瓚), 어머니는 생원 정참(鄭叅)의 딸이다. 누이가 남명 조식(曺植)의 할머니이다. 1474년(성종 5)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승문원정자(承文院正字)에 제수되었다. 1479년 문과중시에 1등으로 급제하여 형조정랑(刑曹正郞)에 발탁되고, 홍문관 교리·응교를 거쳐, 시강원 필선·보덕으로서 세자의 사부가 되었다.

1495년(연산군 1) 창원부사로 파견되었다가 곧 사직하고, 지리산에 은거하여 학문에 전념하였다. 1504년 갑자사화가 일어나, 세자시에 그의 풍간(諷諫)함과 집요한 진강(進講)을 혐오했던 연산군에 의해서 참수되었다. 1506년(중종 1) 중종반정 이후 관작이 회복되고 승정원도승지(承政院都承旨)에 추증되면서 신원(伸寃)되었다.

[건립 경위]

묘비의 건립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비문에 보이는 그의 증손서인 조원우(曺元佑)의 세 아들 중 둘째 조경홍(曺慶洪)이 1554년생이고, 셋째 조경찬(曺慶贊)의 생년을 고려하면 1556년(명종 11) 이후에 세워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조지서의 후손은 크게 번창한 편이 아니므로 이 지역 사림파의 대표적 인물이자 조지서 누이의 손자인 조식조지서의 곧은 삶을 현창하려는 묘비 건립에 관계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위치]

하동 대곡리 조지서 묘비하동군 옥종면 대곡리 동곡마을과 삼장마을 사이 구릉에 위치한다. 조선 시대 정수역(正守驛)조지서의 묘역에서 서쪽으로 직선거리로 850m쯤에 위치하였다. 정수역에서 동으로 동곡마을, 북방리를 통해서 바로 진주 평거역으로 나아가거나 북방리, 마곡리, 봉계원[지금의 사천시 곤명면 원전마을]을 거쳐 완사역을 통해서 진주의 평거역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주변에는 조지서의 부인 정씨 정려가 있으며, 옥산서원고성산성, 수정당 등의 문화유산이 존재한다.

[형태]

묘비는 사암으로 된 대좌와 비신 및 지붕돌[加檐石]의 형태이다. 비좌에는 세로 면에 세 개의 연꽃잎[蓮瓣], 모서리마다 연꽃잎이 한 개씩 장식되어 있으며, 지붕돌 중앙에는 끝을 뾰족하게 처리한 구상의 보주(寶珠)[여의주]가 장식되어 있다. 전후면 좌우에는 고사리 문양과 같은 구름무늬[雲紋]이 장식되어 고졸함을 더하고 있다. 지붕돌 아랫면은 부드러운 곡선을 유지하고 있어 안정감을 더한다.

[금석문]

비신의 후면 글씨는 대부분 판독이 되나 전면 및 좌우 측면의 글씨는 판독이 거의 불가능한 상태다. 따라서 비문을 지은 사람과 글씨를 쓴 사람이 누구인지 확인할 수 없다. 그러나 비문의 찬자가 조식이라는 사실은 『남명집(南冥集)』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남명집』의 “중훈대부 시강원보덕 증 통정대부 승정원도승지 조공 묘명 병서(中訓大夫侍講院輔德贈通政大夫承政院都承旨趙公墓銘幷序)”에 따르면 비문은 서(序), 가계와 행력(行歷)[삶의 태도와 관직 생활], 내외 자손, 명(銘)으로 구성되어 있다. 조식은 서에서 “아아! 여기가 조선의 시강원 보덕을 지낸 조공의 묘이다[嗚呼 有明朝鮮侍講院輔德趙公之墓也]”라고 하면서 훌륭한 사람에게 “어찌 군더더기 말이 필요하겠는가[庸詎贅焉]”라고 하였다.

조식조지서연산군에게 죽임을 당한 것을 두고 오자서(伍子胥)의 죽음에 비유하고, 나아가 “애달피 울면서 하늘에 울부짖을 일이다[呱呱之慟 叫叫蒼蒼者矣]”라고 그의 죽음에 원통해 했다. 조식조지서의 후손들이 조지서 누이의 손자인 자신을 인척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거절하지 못하고 평범한 자신이 훌륭하기 이를 데 없는 조지서의 묘비명을 쓴 것이라고 스스로 밝혔다.

다음은 조지서의 가계와 행력을 적고, 이어서 계실(繼室) 정씨의 정려(旌閭)의 행적을 밝히고, 세 아들 조정(趙珵)·조침(趙琛)·조리(趙理)와 손자·손서(孫壻) 등 자손들을 일일이 적어 두었다. 조식은 공자가 자산(子産)을 일러 “옛날의 곧은 유풍을 간직한 사람이다”라고 했듯이 조지서의 삶을 일러 “보덕 역시 옛날의 곧은 유풍을 간직한 사람이다[子産之沒 仲尼出涕曰 古之遺直也 植繼之曰 輔德亦古之遺直也]”라고 하면서 비문을 끝맺었다.

[현황]

하동 대곡리 조지서 묘비는 비석의 재질이 사암이라서 그런지 보존 상태가 썩 좋지 못하다. 비신은 돌이끼와 풍화로 몹시 손상되어 있으며, 전면과 후면에 대부분 먹칠이 되어 있어 까맣게 변색되어 있다. 이 옆에는 1998년 후손들이 세운 묘비가 원래의 묘비와 나란히 서 있다. 묘역은 557.4㎡의 면적에 원형 봉분과 묘비, 상석을 갖추고 있으며, 임천 조씨 지족당공파 종중에서 관리하고 있다. 조지서의 삶이 간략하게 잘 나타난 하동 대곡리 조지서 묘비는 2009년 2월 19일 경상남도 문화재 자료 제458호로 지정되었다.

[의의와 평가]

하동 대곡리 조지서 묘비는 후손이 크게 번창하지 못했던 탓인지 그다지 큰 관심을 받지 못했다. 하지만 조식이 찬술한 묘갈명의 내용을 통해 강직한 인물의 삶의 자세를 엿볼 수 있어 역사 교육 자료로서 의의가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