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목차

근우회 하동지회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3400393
한자 槿友會河東支部
영어의미역 The Geunu Women's Society, Hadong Branch
이칭/별칭 근우 하동지회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지역 경상남도 하동군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추경화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설립 시기/일시 1928년 7월 1일연표보기
관련 사항 시기/일시 1931년 6월연표보기
해체 시기/일시 1931년연표보기
성격 여성 운동 단체
설립자 김한순|채소정 외 10명

[정의]

1928년 7월 경상남도 하동 지역에 설립된 근우회 소속 지회.

[개설]

근우회는 1927년 창립되어 1931년에 해산된 여성 항일 구국 및 여성 지위 향상 운동 단체이다. 1927년 신간회가 조직된 직후, 자매단체의 성격을 띠고 같은 해 5월 민족주의 여성 운동계의 김활란(金活蘭)·유영준(劉英俊)·유각경(兪珏卿)·최은희(崔恩喜)·현신덕(玄信德) 등과 사회주의 여성 운동계의 박원민(朴元玟)·정종명(鄭鍾鳴)·주세죽(朱世竹) 등이 주동이 되어 한국 여성의 대동단결을 꾀하고 새롭고 효율적인 여성 운동을 전개하려는 취지로 창립하였다.

[설립 목적]

근우회 하동지회는 하동 지역 여성들의 대동단결을 도모하고 효율적인 항일 및 여성 운동을 전개하기 위해서 설립되었다.

[변천]

근우회 하동지회는 1928년 7월 1일 설립되었다. 위원장은 김한순(金漢順)이었으며, 채소정(蔡小丁), 조필열(趙必烈), 강정회(姜貞會), 김점표(金點杓), 박삼모(朴三模), 조복금(趙福今), 조정희(趙貞姬), 김귀례(金貴禮), 신수명(辛秀明), 제영순(諸英順), 김보배(金寶培), 김은례(金恩禮), 강정회, 조양순, 도영순 등이 함께 활동하였다. 『조선일보』 1929년 3월 29일자에 따르면 1929년 3월에 정기총회를 개최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1931년 6월에 개최된 전국 대회에 근우회 하동지회가 참여하였다.

그러나 1930년대에 들어 전국 대회가 3일간 연기되거나 무기한 연기되는 등 일제의 직·간접적인 탄압이 이어지면서 해소 절차 없이 근우회근우회 하동지회가 해체 된 것으로 추정된다. 즉, 일제가 만주로 진출하기 위해 조선 내부를 먼저 단속하고 각종 청년회, 신간회, 농민 등이 개최하려는 모든 모임을 중단시키고 작은 일도 큰일인 것처럼 확대·해석하여 체포 구금을 일삼았기 때문에 근우회 모임도 중단되고 만 것으로 보인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주로 문화 계몽 및 교육 활동을 전개하였다. 야학 운동, 계몽 강연, 회보 발간 및 배포 등과 관련된 활동을 전개했으며, 일제에 의해 옥에 갇힌 동지들을 면회하여 투쟁심을 불러일으키기도 하였다. 그러나 운동 단체였던 만큼 음성적인 활동이 더 많았고 언론에 활동 행적이 널리 보도되지 않은데다 당시의 회의록, 회원 명부, 입출금 내역서, 활동 일지 등도 남아 있지 않아 구체적인 활동 내용은 파악되지 않고 있다.

[의의와 평가]

근우회신간회와 함께 1927년 민족 협동 전선론의 일환으로 탄생되었다. 민족주의 계열과 사회주의 계열이 연합하여 보다 큰 힘으로 일제에 대항하고자 했으나 좌우파의 잠재된 갈등과 무산자 운동에 집중해야 한다는 코민테른 노선의 변화 및 해소론의 등장, 일제의 탄압과 분열 책동 등으로 해체되었다. 그러나 근우회는 일제 강점기 전국에 70여 개의 지회를 가졌을 뿐 아니라 동경 등에 해외 지부까지 갖춘 명실상부한 여성 운동 최대 조직이었다. 근우회 하동지회 역시 ‘반제 반봉건’이라는 근우회의 기치 하에 여성의 지위 향상과 해방을 위하여 많은 활동을 전개한 것으로 보인다.

[참고문헌]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