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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3400397
한자 三一運動
영어의미역 March First Independence Movement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경상남도 하동군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김준형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919년 3월 13일연표보기
발생|시작 장소 경상남도 하동군 횡천면 여의리 지도보기
발생|시작 장소 경상남도 하동군 북천면 직전리 지도보기
발생|시작 장소 경상남도 하동군 옥종면 월횡리 지도보기
성격 독립운동
관련 인물/단체 정세기|박치화|정윤기|정성기|이경호|정이백|문공학|하일로|최인우|정화영|권대형|권상숙|김중수|권복대|하계원|정남시|정재운|이종인|박영묵|정상정|김기범|이정철|김주석

[정의]

일제 강점기 1919년 3월 1일을 기해 경상남도 하동군을 포함하여 전국에서 일어난 항일 독립 만세 운동.

[역사적 배경]

제1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제국주의 열강들의 힘이 약화되는 한편 러시아에서는 소비에트 혁명이 성공하면서 식민지 약소민족에게 민족 해방에 대한 새로운 희망의 불씨를 지펴 주었다. 그리하여 전 세계 곳곳에서 민족 해방 운동의 열기가 고조되었다. 우리나라에서도 일제의 수탈에 반발하여 민족 운동의 기운이 고조되고 있는 가운데 미국 윌슨 대통령의 민족 자결주의 제창으로 더욱 큰 영향을 받았다.

[경과]

1919년 1월 22일 고종 황제의 갑작스런 죽음은 국민에게 충격으로 다가왔다. 고종이 일본에 의해 독살 당했다는 소문이 널리 퍼졌다. 이것은 국민들에게 배일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역할을 하였다. 국장일이 3월 3일로 결정되자 전국에서 유림들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서울로 몰려들었다. 3·1 운동을 주도한 자들은 이 기회를 이용하고자 하였다. 만세 운동을 통해 우리 민족의 독립 국가 건설 의지를 일제와 전 세계에 널리 알리고자 하였다. 이렇게 해서 탑골공원에서의 시위가 시작된 것이다.

서울에서 벌어진 3·1 운동은 이후 전국 방방곡곡으로 퍼졌다. 하동에서도 마찬가지로 곳곳에서 만세 운동이 전개되었다. 하동의 만세 운동의 효시는 3월 13일 하동시장에서 벌어진 독립 만세 운동이다. 양보면 출신으로 양보일신학교 교사로 있던 정세기(鄭世基) 등의 주도로 시작된 이날의 시위는 군민들의 관심과 호응을 얻어 군내 각 지역에 자극을 주었다.

이후 3월 18일에도 적량면장을 사직한 박치화(朴致和)가 하동 읍내 장터에서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 선언서를 낭독하고 독립 만세를 외치니 군중들이 곧바로 무리지어 가담하였다. 3월 23일에도 정윤기(鄭潤基)·정세기·정성기·이경호(李璟鎬)·정이백(鄭伊伯) 등이 주도하여 하동시장에서 대대적인 만세 시위를 벌였다.

3월 21일에는 문공학(文孔學) 등이 횡천면 여의리에서 주민을 모아 독립 만세를 외쳤고, 다시 4월 3일 북천면 직전리에서 독립 만세 운동을 하다가 체포되었다. 옥종면에서는 3월 24일 하일로(河一魯)의 주도로 안계시장에서 만세 시위가 전개되었다. 최인우·정화영·권대형·권상숙·김중수·권복대·하계원 등도 인근 수곡면 일대의 주민들과 함께 독립 만세를 외치며 대형 태극기를 경찰 주재소 정문에 세우고, 일본 경찰의 총을 빼앗아 던지는 등 거세게 저항하였다.

3월 29일에도 정남시(鄭南時) 등이 옥종면 월횡리에서 주민을 동원하여 시위를 벌였다. 같은 날 진교면에서도 정재운(鄭在雲) 등의 주도로 1,000여 군중이 집결하여 시위를 벌였는데, 경찰 주재소를 포위하고 만세를 외치다가 주동자를 비롯한 시위군중 다수가 체포 구금되었다. 시위는 이튿날에도 계속되었고, 700여 군중은 구속자 석방을 외치며 시가지를 행진하였다. 4월 6일에도 진교면 주민 1,000여 명이 진교 시가를 돌며 구속자 석방과 대한 독립 만세를 외쳤다.

고전면에서는 4월 6일 이종인(李宗仁)·박영묵(朴永黙)·정상정(鄭相正) 등이 민족 대표 33인을 본떠 조직한 일신단(一身團)을 중심으로 고전면 배더리 시장[배다리 장터]에서 거군적인 시위를 전개하였다. 이날 배더리 시장[배다리 장터]에서는 인근 양보면·진교면·금남면 주민들까지 합세하여 1,000여 명이 시위에 동참하였다. 청암면에서는 4월 7일 김기범(金琪範) 등이 대형 태극기를 마을 입구에 게양하고 다음 날 주민들을 선동하여 청암면사무소까지 시위행진을 했다.

화개면에서는 4월 11일 이정철(李正哲) 등이 새벽에 사방에 벽보를 붙이고 화개면사무소 담벼락에는 면 직원의 사직을 촉구하는 권고문을 붙이는 한편, 태극기를 배포하고 주민을 선동하여 시위를 전개하였다. 한편 청소년들도 만세 운동에 동참하여 4월 6일 화개장터에서 승려인 김주석(金周錫)의 주도로 학생들의 거사가 있었으며, 4월 7일 하동 읍내에서는 하동보통학교 학생 160여 명이 시장통으로 나와 만세를 불렀다.

[결과]

이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체포되어 고문을 당하고 옥살이도 하였지만, 일제도 한국 국민에게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여 억지로 끌려가게 하는 무단 통치 정책을 문화 통치로 전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를 계기로 해외에는 지속적인 민족 운동을 전개해 갈 수 있도록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수립되었다. 하동에서도 하동청년동맹신간회·근우회 지회 등이 설립되어 독립운동에 매진하게 되었다.

[의의와 평가]

일제의 무력 탄압으로 인해 3·1 운동의 궁극적인 목적 달성은 좌절되었지만, 우리 민족의 독립 의지를 전 세계에 알리고 우리 스스로의 의지를 새롭게 다지는 계기가 되었다. 박치화(朴致和) 등 하동지역 독립운동가들이 작성해 사용한 대한독립선언서가 현재 독립기념관에 보관되어 있으며, 고전면 성천리하동군 고전면민 만세 운동 기념비가, 고전면 고하리3·1 독립운동 기념비가, 청암면 중이리청암면 독립 유공자 추모비가 있어 하동 지역 3·1운동의 모습을 말해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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