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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3400541
한자 河東雙磎寺天王門
영어의미역 Cheonwangmun gate of Ssanggyesa Temple
분야 종교/불교,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건물
지역 경상남도 하동군 화개면 운수리 208
시대 고대/삼국 시대/신라,조선/조선
집필자 곽승훈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문화재 지정 일시 1974년 12월 28일연표보기 - 하동 쌍계사 천왕문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26호 지정
문화재 지정 일시 2021년 11월 19일 - 하동 쌍계사 천왕문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재지정
건립 시기/일시 840년연표보기
개축|증축 시기/일시 1704년연표보기
관련 사항 시기/일시 1705년연표보기
개축|증축 시기/일시 1825년연표보기
개축|증축 시기/일시 1880년연표보기
개축|증축 시기/일시 1978년연표보기
현 소재지 경상남도 하동군 화개면 운수리 208 지도보기
성격 건축물|천왕문
양식 익공식 맞배지붕
정면 칸수 3칸
측면 칸수 2칸
소유자 쌍계사
관리자 쌍계사
문화재 지정번호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정의]

경상남도 하동군 화개면 운수리 쌍계사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에 지어진 것을 조선 후기에 중건한 건축물.

[개설]

쌍계사(雙磎寺)는 통일 신라 때인 722년(성덕왕 21) 대비 화상(大悲和尙)삼법 화상(三法和尙)이 세운 사찰로, 처음에는 옥천사라 불렀다. 뒤에 정강왕(定康王)[재위 886~887]이 절 주변의 지형을 보고 2개의 계곡이 만난다고 하여 쌍계사로 고쳐 불렀다. 임진왜란 때 왜군에 의해 소실된 것을 벽암대사가 1632년(인조 10)경에 터를 옮겨 새로 지었으며, 이후 여러 번 수리하였다.

사천왕문에 봉안된 사천왕(四天王)은 수미산(須彌山)의 중턱 사방을 지키며, 사바세계의 중생들이 불도에 따라 올바르게 살아가고 있는지를 살피고 중생들을 올바른 길로 인도하는 신적인 존재이다. 천왕문 안에는 동방 지국천(持國天)이 검을, 북방 다문천(多聞天)이 비파를, 서방 광목천(廣目天)이 탑을, 남방 증장천(增長天)이 용을 쥐고 있는 무서운 모습으로 묘사되어 있다. 이러한 사천왕상을 봉안한 천왕문은 사찰 수호의 의미도 가지고 있으나, 불국 세계 진입 과정 중에 수미산 중턱의 청정한 경지에 들어가는 관문이라는 상징적 의미가 있다.

[위치]

쌍계사 경내의 진입부에 위치한다.

[변천]

하동 쌍계사 천왕문(雙磎寺天王門)은 신라 때인 840년(문성왕 2)에 진감 선사(眞鑑禪師)가 처음 조성하였으리라 추정된다. 고려 시대의 내력은 알 수 없으며,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1704년(숙종 30) 백봉 선사가 새로 중건하였고, 이듬해에 사천왕상을 봉안하였다. 1825년(순조 25) 인정 선사(印定禪師)와 성첨 선사(聖沾禪師)가 중수하였으며, 1880년(고종 17)에 사천왕상을 개채(改彩)하였다. 현대에 들어와 1978년 승려 고산(杲山)이 다시 중수하였다.

[형태]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익공식 1층 건물이다.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맞배지붕 기와집으로, 처마는 겹처마이고 양측 박공(牔栱)에는 풍판(風板)을 달았다. 정면 3칸의 가운데는 개방하여 통로로 사용하고, 측면 양측 칸은 벽으로 막아서 사천왕상을 봉안하였다. 외벽에는 십이지신(十二支神)이 그려져 있으며, 중앙의 개방된 정면 통로 위에는 홍살문을 만들어 놓았다.

[현황]

2011년 현재 하동 쌍계사 천왕문의 소유자 및 관리자는 쌍계사이다. 1974년 12월 28일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26호로 지정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경상남도 유형문화재로 재지정되었다. 내부에 봉안된 사천왕상은 목조로 제작된 475㎝ 규모의 대형 작품이다. 현존하는 사천왕상 불교 조각 중에 그 규모가 상당히 큰 작품으로, 신체의 당당함이 돋보인다.

[의의와 평가]

하동 쌍계사 천왕문에 봉안된 사천왕상은 다른 사찰에 봉안된 조선 시대의 사천왕상과 사천왕탱화와의 도상 비교를 통한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문화재적 가치가 높다. 또한 건물 외벽에 십이지신을 그린 것은 조선 후기의 불교가 민중의 민속 신앙을 적극 수용하였다는 상징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나아가 정면 통로 위에 정려문과 같은 홍살문을 만들어 놓은 것은 조선 후기에 들어와 불교와 유교가 교섭되는 양상을 잘 느끼게 하는 것으로서 의미가 크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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