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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3401117
한자 加耶
영어음역 Gaya
이칭/별칭 가야(伽耶·伽倻),구야(狗邪·拘邪),가락(駕洛·加洛),가라(加羅·加良·伽羅·迦羅·呵奇),가락(駕洛·伽落),하라(賀羅),임나(任那)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상남도 하동군
시대 고대/삼국 시대/가야
집필자 박용국

[정의]

서기 전후 무렵부터 562년까지 경상남도 하동군을 비롯한 낙동강 유역에 존재했던 소국들의 총칭.

[개설]

가야(加耶)는 기원 전후부터 562년까지 낙동강 동쪽 일부 지역과 낙동강 서쪽 경상도, 전라도 동부 지역에 존재했던 소국들의 총칭이다. 좁은 의미로는 김해의 구야국이나 고령의 대가야국을 지칭하기도 한다.

[가야의 명칭과 관련 자료]

가야가야(加耶, 伽耶, 伽倻), 구야(狗邪, 拘邪), 가락(駕洛, 加洛, 伽落), 가라(加羅, 加良, 伽羅, 迦羅, 呵奇), 하라(賀羅), 임나(任那) 등 여러 이름으로 문헌 기록에 나타난다. 이 가운데 가야(加耶)는 『삼국사기(三國史記)』에서 일반적 용례로 쓰이며, 그 사용 빈도도 높은 편이므로 가야의 한자 명칭으로 가장 타당할 것이라는 견해가 있다. 가야의 여러 명칭은 모두 ‘가야’와 ‘가라’를 음차 표기한 것으로 보고 있다.

가야의 역사서로서 고려 문종 때 『가락국기(駕洛國記)』가 있었다고 하나 전하지 않고, 그 내용을 발췌한 것이 『삼국유사(三國遺事)』의 「가락국기」라고 보고 있다. 이 외에 가야에 관한 기록은 『삼국지(三國志)』 동이전, 『삼국사기』,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등이고, 『일본서기(日本書紀)』의 가야 관계 기록은 많이 왜곡된 내용이어서 사료 비판이 요구된다.

[가야 연맹 왕국의 형성과 변천]

기원전 1세기에 이르러 경상남도 해안 지대에 철기 문화가 널리 보급되면서 농업 생산력의 발전을 가져왔다. 이에 따라 경상남도 해안 지대의 성읍들 간에 군사력과 경제력의 우열이 드러나면서 우세한 성읍을 중심으로 하여 변한 소국들이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이 같은 발전 추세 속에서 소국 간의 통합도 이루어졌으며, 김해의 구야국이 주변의 여러 가야의 중심 세력으로 성장하여 2~3세기 변한 지역 소국들 간의 연맹을 이루게 되었다. 구야국이 중심이 된 전기 가야 연맹이 성립한 것이다. 전기 가야 연맹의 세력 범위는 낙동강 유역 일대에 널리 퍼져 있었다. 전기 가야 연맹은 4세기 초 이후 국제 관계에 변화가 일어나면서 세력이 약화되기 시작해서 4세기 말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남정(南征)으로 와해되었다.

4세기 말에서 5세기 초 경상남도 해안 지대 소국들이 몰락하면서 발생한 유민(流民)이 낙동강 서쪽 경상도 내륙으로 이동함에 따라 5세기 이후 고령·함양 등의 내륙 산간 지역이 급속히 개발되기 시작하였다. 낙동강 서쪽 경상도 내륙 지방에서 안정적인 농업 기반을 유지하던 토착 세력들은 유민들의 기술과 문화를 수용하면서 발전을 이루게 되었다.

특히 고령의 대가야가 가야의 새로운 중심 지역으로 성장하고, 5세기 후반에 들어 옛 가야 지역의 내부에서 일어난 재통합의 논의를 주도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고령의 대가야국을 중심으로 후기 가야 연맹이 형성되었다. 후기 가야 연맹은 백제·신라와 대등하게 경쟁하면서 6세기 초 하동을 포함한 경상남도 서부 지역과 전라남도 동부 지역은 물론이거니와 전라북도의 운봉·장수까지 그들의 세력권으로 삼아 영역을 확고히 하였다.

이때 섬진강을 낀 하동 지역은 대가야의 대외 교섭 창구 역할을 하였다. 따라서 하동의 대사국과 악양의 낙노국(樂奴國)은 후기 가야 연맹의 한 일원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하겠다. 그러나 6세기 초엽 신라가 남부 지역을 병합하고, 백제가 동쪽으로 진출하면서 하동 지역의 가야 세력도 몰락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가야의 여러 나라]

가야에 속하는 나라들은 기록마다 차이가 난다. 『삼국지』 동이전에는 이른바 변진십이국(弁辰十二國)이라는 미리미동국(彌離彌凍國)[밀양]·접도국(接塗國)[칠원]·고자미동국(古資彌凍國)[고성]·고순시국(古淳是國)[진주]·반로국(半路國)[고령]·낙노국[악양]·군미국(軍彌國)·미오야마국(彌烏邪馬國)[창원]·감로국(甘路國)[김천시 개령]·구야국(狗邪國)[김해]·주조마국(走漕馬國)[함양]·안야국(安邪國)[함안]·독로국(瀆盧國)[부산]이 나오는데, 3세기 중엽의 여러 가야 국명으로 본다.

한편 『삼국유사』 가야조에는 아라가야(阿羅伽耶)[함안]·고령가야(高寧伽耶)[함창]·대가야(大伽耶)[고령]·성산가야(星山伽耶)[성주]·소가야(小伽耶)[고성]·금관가야(金官伽耶)[김해]·비화가야(非火伽耶)[창녕]가 나타나며, 『삼국사기』 지리지에는 고령가야·금관국·아시량국(阿尸良國)·대가야국이 나온다. 『삼국사기』 악지에 전하는 우륵 12곡 중에서 하가라도(下加羅都)·상가라도(上加羅都)·달이(達已)·사물(思勿)·물혜(勿慧)·하기물(下奇物)·거열(居烈)·사팔혜(沙八兮)·이사(爾赦)·상기물(上奇物) 등도 가야 연맹 소속 국명이라고 한다.

『일본서기』에도 상신리(上紳唎)·하신리(下紳唎)·사타(娑陀)·모루(牟婁)·상기문(上己汶)·하기문(下己汶)·대사(帶沙)·남가라(南加羅)·탁순(卓淳)·탁기탄(啄己呑) 등과 아울러 가야 멸망 당시 이른바 임나십국(任那十國)이라는 가라국(加羅國)·안라국(安羅國)·사이기국(斯二岐國)·다라국(多羅國)·졸마국(卒麻國)·고차국(古嵯國)·자타국(子他國)·산반하국(散半下國)·걸찬국(乞飡國)·임례국(稔禮國)이 나타난다.

지금까지 보았듯이 가야의 여러 나라 이름들은 우리의 역사서에 등장하는 것보다 중국과 일본의 역사서에 훨씬 많은 수가 언급되고 있다. 여러 가야 가운데 가야 연맹을 주도했던 김해의 구야국과 고령의 대가야만이 건국 신화가 전해온다. 김해에 전하는 수로왕 신화는 『삼국유사』「가락국기」에, 고령에 전하는 대가야 시조 신화는 『동국여지승람』 고령현 편에 수록되어 전하고 있다. 이처럼 가야의 건국 신화는 시기와 지역을 달리하는 두 종류가 전해지고 있다. 이는 가야사의 복잡한 전개 과정과 중간에 중대한 변동이 있었음을 시사하는 것이라고 한다.

[하동 지역과 가야]

1. 남해안 유역 중심의 초기 가야

남강 중류인 진주 대평 유적의 대규모 경작 유구를 통해서 볼 때, 기원전 10세기에 이르러 하동 지역의 남강 수계권은 농업 생산력이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을 것으로 짐작된다. 농업 생산력이 지속적으로 발전하면서 점차 읍락 내부의 경제력과 신분적 격차가 심화되면서 고인돌을 축조하는 집단이 나타나 하동 지역 읍락 사회의 주도권을 쥐고 서서히 작은 정치체를 형성하여 갔을 것이다.

기원전 1세기 무렵 고조선 유이민과 그들의 선진 문화가 영남 지역에 유입되면서 경상도 서부 지역은 2~3세기에 이르러 이른바 변한과 진한에 24개의 소국이 탄생했던 것이다. 하동 지역은 청동기 문화와 농경문화를 바탕으로 한 작은 정치체가 고전의 다사국과 악양의 낙노국으로 성장하였으며, 두 소국이 이 지역 가야 사회의 실체로 생각된다.

2세기 말까지 가야는 구야국을 중심으로 발전을 거듭했지만 3세기 들어 구야국이 무역을 일방적으로 독점하면서 여타 소국 간에 부의 불평등이 야기되자, 전기 가야 연맹의 결속이 흐트러졌다. 사천·고성·칠원·마산 등지의 포상팔국(浦上八國)[ 201~212]이 해상 교역권을 빼앗기 위해서 김해의 구야국을 공격하였다. 구야국은 외세인 신라를 끌어들여 군사적 승리를 거두었지만 전기 가야 연맹의 결속력에 커다란 타격이 일어났다.

한편 313~314년 고구려가 낙랑군과 대방군을 차례로 정복하였다. 이로써 가야를 중심으로 짜인 해상 무역 네트워크가 붕괴하고, 구야국이 점차 쇠퇴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400년 고구려의 광개토대왕가야를 공략하였다. 5세기 이후 가야의 중심은 서서히 남해안 지역에서 북부 내륙 지역으로 옮겨가기 시작하였다. 상대적으로 후진 사회였던 북부 내륙 지역에 남해안 지역의 선진 세력들이 이주해 풍부한 철산지를 개발하면서 경제력과 군사력을 키웠다. 특히 고령 지역의 반파국(伴跛國)이 가야 지역의 새로운 맹주국으로 부상하며, 이후 대가야로 발전하였다.

2. 섬진강 수운과 대가야 문화권

479년에 대가야왕은 중국의 남제(南濟)에 외교 사절을 파견하여 보국장군(輔國將軍)·본국왕(本國王)에 제수되었다. 내륙에 위치한 대가야 사절단의 대중 교섭 지름길은 낙동강과 섬진강의 수운을 이용하는 것이었다. 당시의 낙동강 하류 역은 신라가 장악하고 있었으므로 결국 대가야는 하동 지역의 섬진강의 수운을 대외 교섭의 창구로 활용하였다.

이를 통해서 보면 대가야는 고령, 합천, 거창, 함양, 남원[운봉], 곡성, 구례, 하동 지역에 정치력을 행사하고 있었던 것이다. 대가야식 토기와 유물이 경상남도 서부 지역에서 출토되고 있다는 점에서도 그것을 반증한다. 또한 가야금 12곡명은 경상남도 서부 지역의 여러 가야의 국명으로 해석하고 있는데, 대가야의 국왕이 가야금 12곡에 서부 경상남도의 여러 가야를 포함시켜 정치적 통합을 도모하고자 하였던 목적에서 나왔으며, 문화적 일체감만이 아니라 정치적 효과도 크게 거두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로써 대가야 국왕이 하동 지역을 대외 교섭의 창구로 활용하여 크게 성공을 거두었던 것이다.

6세기 초에 이르러 대가야는 백제와의 국경 지역인 기문(己汶)[지금의 전라북도 임실] 지역을 둘러싸고 백제와 전투를 벌여 패배하였다. 이로써 대가야는 대왜(對倭) 교역의 중심지인 대사(帶沙)[지금의 하동] 지역마저 백제에게 빼앗겨 대왜 교역권을 상실하게 되었다. 바꾸어 말해서 하동 지역은 6세기 초 이후 백제의 지배하에 들어가면서 대가야 문화권이라는 기존 문화 요소의 계승성이 크게 흔들릴 정도는 아니었을지라도 백제의 문화적 영향을 어느 정도 받고 있었다. 최근에 하동군 하동읍 흥룡리에서 발견된 5~6세기 수혈식 석곽묘인 대단위 가야 고분군에서는 소가야·대가야·백제·신라 등의 외래 양식 토기와 토착 양식의 토기가 같은 비율로 출토되어 하동 지역 정치체의 성격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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