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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건국준비위원회 하동군지부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3401137
한자 朝鮮建國準備委員會河東郡支部
영어의미역 Preparation Committee for National Construction, Hadong-gun Branch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지역 경상남도 하동군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장상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설립 시기/일시 1945년 8월 27일연표보기
성격 건국 준비 단체

[정의]

해방 직후 경상남도 하동군 지역에서 조직된 조선건국준비위원회의 하동 지역 지부.

[개설]

8·15 해방과 더불어 일제가 물러가자 자주적 민족 국가를 수립하기 위한 움직임이 분출되었다. 일제 강점기 말에 결성된 건국동맹을 기반으로 8월 15일 당일 밤부터 서울에서 조선건국준비위원회가 조직되었다. 지방에서는 조선건국준비위원회의 산하 조직이 8월 말까지 이미 145개가 설립되었으며 치안대 지부도 162개가 설치되었다.

[변천]

하동군의 건국준비위원회 설립 과정을 보면, 우선 1945년 8월 16일 하동병원에서 하동치안유지회 발기준비위원회가 개최되어 각 부서 책임자가 결정되었다. 하동치안유지회 발기준비위원회는 8월 19일 14시 하동군 하동읍 초등학교에서 군민 1만여 명이 참가한 가운데 하동군 민중 대회를 개최하였다. 그리고 위원장 박치화(朴致和), 부위원장 권대형(權大衡), 치안부장 김태수(金泰守), 총무부장 최상욱(崔祥旭), 운동부장 여경엽(余璟燁), 경제부장 정재동(鄭在東), 문화부장 고대작(高大作) 등과 함께 치안유지회 위원 70여 명을 선출하였다.

이어 8월 27일 마침내 조선건국준비위원회 하동군지부가 조직되었다. 위원장에 정진기(鄭璡基), 부위원장에 강석근(姜錫根), 문화부장에 고대작(高大作) 등이 선출되었으며, 치안을 맡을 하동치안대가 김한철(金漢喆)을 대장으로 하여 경찰서 업무를 대행하였다. 또한 진교면 건국준비위원회도 결성되어 위원장 윤재환(尹在煥), 부위윈장 이병대(李炳大), 내무부장 윤종수(尹鍾壽) 등이 간부로 활동하였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건국준비위원회는 패망한 일제로부터 모든 권력을 이양 받아 사회 질서를 유지하며 민족 국가 수립을 완수할 임무를 띠고 있었다. 그러나 하동에서는 일제로부터 치안권을 접수하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8월 20일 치안유지회 청년 100여 명이 하동군 하동읍 광평리에 모여 일본 경찰로부터 경찰서를 접수하기로 결의하였다. 치안차장 심양규와 청년 12명이 대표로 경찰서에 들어가 치안권을 넘겨줄 것을 요구했으나 거절당하였다.

일본 경찰은 이날 밤부터 십 수 명씩 떼를 지어 읍내를 누비며 위협 총격을 가하는 등 난동을 부렸다. 일본 경찰 무리들은 하동초등학교에서 청년 3명을 사살하고 시신을 경찰서 방공호에 암장하는 만행을 저지르기도 했다. 하동 지역의 일본인들은 8월 20일 모두 재빨리 귀국했으며, 일본인 경찰서장은 체포되어 부산국제재판소에서 복역하다 일본으로 이송되었다.

이후 치안유지회는 조선건국준비위원회 하동군 지부가 되어 하동군의 치안을 맡았으나 해방 후의 혼란 상황과 좌우 대립 속에서 질서를 유지하기가 쉽지 않았다. 9월 2일 군수가 좌익에게 감금되어 위협받은 사건이 발생했으며, 9월 3일에는 우익 인사 신 모가 읍내 길거리에서 공공연하게 살해당하는 등 좌익 테러 사건이 잇달았다.

[의의와 평가]

조선건국준비위원회는 정부 수립 전까지만 기능하는 한시적인 기구였다. 9월 6일 조선건국준비위원회는 전국 인민 대표자 대회를 소집하여 조선인민공화국의 성립을 선포하였다. 다음날 조선건국준비위원회의 해체와 더불어 각 지역의 지부들은 인민위원회로 개편되었다. 하동군지부도 9월 15일 하동군 인민위원회로 개편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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