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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항쟁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3401142
한자 十月抗爭
영어의미역 People's Uprising in October 1946
이칭/별칭 대구 폭동,대구 10·1 사건,10월 인민 항쟁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경상남도 하동군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장상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946년 10월 8일연표보기
성격 민중 항쟁

[정의]

1946년 미군정의 양곡 배급 정책의 실패에 맞서기 위해 대구에서 일어난 민중 항쟁이 경상남도 하동군을 비롯하여 전국으로 확산된 사건.

[역사적 배경]

1946년 4월의 민주주의민족전선[민전] 계통 정당, 사회단체에 대한 미군정의 탄압과 함께 조선공산당은 1946년 5월 미소공동위원회가 휴회된 이후 정판사 사건[1946년 5월 조선공산당이 일으킨 지폐 위조 사건] 등으로 미군정의 집중적인 탄압을 받았다. 이에 대응하여 공산당에서는 7월에 이른바 ‘신전술’을 채택하였다. 이후 좌익은 전국적인 규모에서 반미 운동을 전개하였고, 그 후 좌우익 간의 각종 테러 사건, 총파업 사건, 폭동 사건 등이 잇따라 야기되었다. 1946년 9월 4일 조선공산당, 인민당, 신민당의 3당 합당을 결정하여 남조선노동당[남로당]으로 새롭게 출발하였다.

[경과]

1946년 10월 1일 대구에서 시발된 이른바 10월 항쟁은 10월 3일부터 경상남도로 파급되었으며, 진주와 마산에서 가장 심한 폭력이 행해졌다. 하동군에서는 10월 8일과 12일 사이에 북천면, 횡천면, 옥종면, 청암면, 진교면 등 5개 면에서 항쟁이 발발하였다. 8일에 약 50명의 군중이 군내의 지서를 공격하여 1명의 경찰과 3명의 우익 인사를 납치하고 무기를 탈취하였다. 경찰이 출동하여 항쟁을 진압하고 20여 명을 체포하였다.

진교면에서는 9일 군중들이 지서 앞에 모여 식량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으나 경찰이 6명을 체포하고 시위 군중을 해산시켰다. 북천면에서는 11일 새벽 4시에 300여 명의 승려들이 지서를 공격하여 총과 탄환을 탈취하였으며, 면장을 구타하고 마을을 장악하였다. 미군정은 11일과 12일에 동래에서 경찰들을 출동시켜 항쟁을 진압하고 마을을 회복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1명의 군중이 경찰 발포로 사망하였다.

횡천면에서는 10일 오전 10시에 200여 명의 군중이 지서를 공격하여 지서의 전화선을 끊고 경찰을 구타하였다. 11일 미군이 출동하여 25명을 체포하고, 군중들이 탈취하였던 총과 탄환을 회수하고 마을을 회복하였다. 이후 미군이 계속 주둔하여 치안을 담당하였다.

옥종면에서는 11일 오전 9시에 400여 명의 군중들이 지서를 공격하고 건물을 파괴하여 지서 경찰관 5명이 피신하였다. 또한 3명의 우익 인물의 집을 공격하여 가옥을 파괴하였다. 미군과 경찰이 출동하여 진압하는 과정에서 발포하여 5명이 죽고 2명이 부상당하였으며 24명이 체포되었다.

청암면에서는 9일 새벽에 엽총으로 무장한 자를 포함하여 100여 명의 군중이 지서를 공격하여 경찰관 2명을 살해한 뒤 총기를 탈취하고 묵계 쪽으로 들어갔다. 진압하고 항쟁에 참여하였던 주민 16명을 체포하였다. 이 과정에서 1명의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이후 경찰 측은 대한독립촉성국민회 하동군청년연맹의 김관규·박도진·정봉상·김영수·백형원·정금천 등 청년 20여 명과 함께 출동하여 폭동 참가자들을 추격, 청학동 뒷산에서 접전 끝에 2명을 사살하고 1명을 생포하였으나 나머지 5명은 지리산 세석 쪽으로 잠적하였다.

하동군에서는 5개 면에서 항쟁이 발생하였으니 비교적 많은 면에서 발생한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러나 개별 면 단위 차원의 투쟁으로 그쳤다. 또한 다른 지역에서 발생한 대규모 군중 투쟁과는 달리 주로 새벽에 농민 조합원과 민청원으로 구성된 소규모 투쟁이 이어졌다.

[결과]

통영군에서 대규모 군중 투쟁이 발생하는 등 항쟁이 경상남도 전 지역으로 확산되자 경상남도 군정은 적극적인 진압에 나섰다. 10월 5일 일체의 시위와 집회를 금지한다고 발표하고 8일부터는 학생들에게 임시 휴교령을 내렸다. 미군과 경찰이 군중들의 투쟁에 대비하여 폭동 예비 혐의로 농민들을 구금하거나 마을마다 가폭동 진압 조직을 만들었다. 그리고 항쟁이 발생하면 철저히 물리력으로 진압하였다.

투쟁이 격렬해짐에 따라 미군과 경찰력이 분산될 수밖에 없었고, 이를 보완하기 위해 우익 세력, 특히 우익 계열의 청년들이 진압에 적극 동원되었다. 이들은 항쟁 관련자를 체포하는 데 협력한다는 명목으로 주민들을 불법적으로 체포하거나 테러를 자행하였다. 항쟁이 끝난 후 경찰의 보복과 우익 청년들의 테러 행위는 극에 달하였다.

하동군에서는 대한독립촉성청년연맹 소속의 청년들이 자신들의 조직을 확대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조직에 기부를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마을 주민을 폭행하기도 하였다. 10월 항쟁은 격렬하게 전개되고 진압 방식도 무자비하였기 때문에 물적·인적 피해가 컸다. 미군의 정보 보고서에 의하면 경찰과 시위 군중을 포함하여 36명이 사망하고 부상자는 128명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항쟁 기록에 나타난 것만 해도 사망자가 100명에 이른다.

[의의와 평가]

1946년 10월 항쟁의 영향으로는, 첫째, 정치·경제 및 사회 분야에 있어서의 미군정 정책의 실패가 뚜렷하게 부각되었다. 미국인들은 해방 후 1년간의 경험을 통해 쌓인 우리 국민들의 불만의 회오리바람을 겪은 셈이었다.

국민들의 불만은 두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우선 해방된 한국에서는 일제와 싸운 애국자들이 관공서 일을 보아야 하는데도 미군정 관리의 대부분이 일제하에서 관리를 하였던 사람들이라는 점이다. 다음으로 쌀 부족과 가격 앙등이다. 쌀 공출과 관련해서는 쌀은 지주들에게서는 세금으로, 소작인들로부터는 세금과 소작료로 징수되어야 하고, 수집된 쌀은 도시에서 배급되고 농민들은 자신의 쌀을 공개 시장에서 팔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노동자들은 임금으로 쌀을 사먹기에는 부족하고 배급도 불충분하고, 관리들은 수집한 쌀을 사리를 위해 이용하고 투기 상인들이 매점매석하기 때문에 문제가 생긴다고 보았던 것이다.

둘째, 반란의 진압으로 운동 세력 지도자들이 체포되거나 피신하면서 인민 위원회와 관련 대중 조직들이 지방에서 권력을 쟁취하는 강력한 세력으로 존재하는 일이 사실상 끝나게 되었다. 셋째, 봉기의 진압과 인민 위원회의 붕괴를 통해서 우파, 특히 국립 경찰의 지위가 크게 강화되었고 우익 청년 조직의 힘도 커졌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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