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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3401200
한자 龍宮金氏
영어의미역 Yonggung Gim Clan
분야 성씨·인물/성씨·세거지
유형 성씨/성씨
지역 경상남도 하동군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박용국
[상세정보]

[정의]

김존중을 시조로 하고 김태백을 입향조로 하는 경상남도 하동군의 세거 성씨.

[개설]

용궁 김씨의 시조인 경숙공(景肅公) 김존중(金存中)은 고려조에 좌승선 태자소보(左丞宣太子小保)를 역임한 후 용궁군(龍宮君)에 봉해졌다. 이후 후손들이 용궁(龍宮)을 본관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루었다. 낭선재(浪仙齋) 김태백(金太白)[1560~1593]은 1593년 진주성 싸움에서 수성장으로서 순절하여 승정원좌승지(承政院左承旨)에 추증되고, 진주 창렬사에 향사되었다. 낭선재의 아들 율헌공(栗軒公) 김준걸(金俊傑)이 옥종면에서 양보면으로 이주하였다. 율헌공의 증손 5형제로부터 하동에 세거하는 벌족(閥族)이 되었다.

[연원]

성씨의 연원은 고려 때 좌승선 태자소보에 오른 김존중용궁군에 봉해졌는데, 이후부터 후손들이 용궁을 본관으로 하였다. 용궁은 경상북도 예천군(醴泉郡)에 속한 지명으로 757년(경덕왕 16)에 예천군의 영현이 되었다. 용궁은 고려 시대 들어 한때 상주에 편입되기도 했으나 1172년(명종 2)에 감무가 두어졌다. 1413년(태종 13)에 현으로 고쳤다. 1895년(고종 32) 지방 제도 개편 때에는 안동부 용궁군, 1896년에는 경상북도 용궁군으로 승격되었으나 1914년 일제 강점기 때의 군·면 통폐합으로 폐지되고 대부분 지역은 예천군에 편입되었다.

용궁 김씨가 16세기 중엽 무렵 오늘날 하동 지역에 처음으로 자리를 잡은 이후 17세기 중엽 이후 하동의 여러 곳으로 번져 나갔던 것으로 생각된다. 율헌공의 증손 5형제로부터 하동의 벌족을 이루었다. 율헌공 김준걸의 증손인 금암공 김상구의 아들 김중운의 후손들은 하동군 적량면 관리로 이주하였다.

[입향 경위]

용궁 김씨의 실제적인 하동 입향조인 김준걸의 아버지는 당시 진주 땅이었던 하동군 옥종면 북방리에 거주하였다. 김준걸은 아버지가 순절한 이후 어린 나이에 이척(姨戚)을 따라 양보면으로 이주하여 실제적인 하동 지역의 용궁 김씨 입향조가 되었다. 18세기 중엽의 『여지도서(輿地圖書)』에 용궁 김씨가 등장하는 것으로 볼 때 당시 하동 지역에서 족세를 과시한 가문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현황]

하동 지역의 용궁 김씨는 이미 18세기 중엽에 벌족이었으나 지금은 족세가 쇠미해졌다. 통계청 자료에 의하면 2000년 현재 하동에 거주하는 용궁 김씨는 198가구, 467명이다. 하동 지역 용궁 김씨 세거지는 하동군 양보면 장암리 우성마을인데, 전체 30가구 가운데 18가구를 차지하는 정도이다.

[관련 유적]

이여재(二如齋)는 하동군 양보면 통정리에 있는 율헌공 김준걸을 시향하는 재실이다. 구산재(龜山齋)는 하동군 적량면 관리에 있는데, 구자산(龜玆山) 아래에 있다는 연유로 구산재라고 했다. 율헌공 김준걸의 증손인 금암공 김상구의 후손들이 선산을 수호하고 해마다 모여 시향(時享)을 드리는 율헌공파의 재실이다. 영언재(永言齋)하동군 양보면 우복리 서촌에 위치하는데, 우천공파(愚川公派)[김상구의 동생인 우천공 김상함(金尙喊)]의 재실이다. 계술재(繼述齋)는 하동군 양보면 운암리에 있는 용궁 김씨 재실인데, 처사 김상침(金尙琛)과 증호조참판 김중원(金重元)을 향사한다. 한서암(寒捿菴)은 하동군 양보면 우복리에 있는 용궁 김씨의 서재인데, 추연(秋淵) 권용현(權龍鉉)[1899~1987]의 기문이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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