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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3401207
한자 姜民瞻
영어음역 Gang Mincheom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경상남도 하동군
시대 고려/고려 전기
집필자 전병철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활동 시기/일시 1012년연표보기
활동 시기/일시 1018년연표보기
활동 시기/일시 1019년연표보기
활동 시기/일시 1020년연표보기
몰년 시기/일시 1021년연표보기
추모 시기/일시 1021년연표보기
출생지 경상남도 하동군 옥종면
묘소|단소 충청남도 예산군 대술면 이치리
성격 장군
성별
본관 진양
대표 관직 지중추사 병부상서

[정의]

고려 전기 하동 출신의 관인(官人).

[개설]

강민첨(姜民瞻)은 『고려사(高麗史)』에는 ‘진주 진강(晉康) 출신’으로 되어 있으며, 1996년 경상남도 하동군에서 발간한 『하동군지』에는 ‘지금의 옥종 땅[현 경상남도 하동군 옥종면] 출신’이라고 기재되어 있다. 이는 1906년 본래 진주 땅이던 옥종이 하동군에 속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강민첨(姜民瞻)은 뜻과 기상이 높고 성품이 강건하고 과감한 성품으로 알려져 있다. 동여진과 거란 등의 외침을 물리치는 데 중요한 공적이 있다.

[활동 사항]

강민첨(姜民瞻)의 본관은 진양(晉陽)이다. 지금의 경상남도 하동군 옥종면에서 태어나 고려 목종 때 문과에 급제하였다. 1012년(현종 3) 5월 동여진이 청하현(淸河縣)[현 경상북도 포항시 청하면]과 영일현(迎日縣), 장기현(長鬐縣) 등지로 쳐들어오자 도부서(都部署)의 문연(文演), 이인택(李仁澤), 조자기(曺子奇) 등과 함께 안찰사로서 주군(州郡)의 병사들을 독려하여 격퇴하였다.

1018년(현종 9) 거란의 소배압(蕭排押)이 10만의 병사를 이끌고 쳐들어오자 평장사 강감찬(姜邯贊)의 부장으로 흥화진(興化鎭)[현 평안북도 의주]에서 적을 크게 무찔렀다. 패배한 소배압의 군대가 곧장 개경으로 공격해 들어오자, 다시 이를 추격하여 자주(慈州)[현 평안도 자산]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그 공을 인정받아 1019년 응양 상장군 주국(鷹揚上將軍柱國)이 되고, 곧 이어 우산기상시(右散騎常侍)에 올라 추성 치리 익대 공신(推誠致理翊戴功臣)에 녹훈되었다. 이듬해인 1020년 지중추사 병부상서(知中樞事兵部尙書)가 되었다.

[묘소]

묘소는 충청남도 예산군 대술면 이치리에 있다. 반구형의 봉분으로 아랫부분에 잘 다듬은 둘레석을 둘렀다. 묘의 앞에는 상석과 장명등(長明燈)[무덤 앞에 세우는 돌로 만든 등]이 있고, 좌우로 동물상·동자상·망주석·인물상 등이 있다.

[상훈과 추모]

1021년(현종 12)에 강민첨이 사망하자 조정에서 3일 동안 조회를 열지 않으며 태자 태부(太子太傅)로 추증하였다. 또한 아들 강단(姜旦)에게 녹(祿)과 벼슬을 주었다. 문종이 즉위 후 강민첨의 거란전 대승을 칭찬하는 교서를 내리고 공신각(功臣閣)에 초상을 그려 후대의 귀감이 되게 하였다. 옥종면 두양리에는 강민첨이 심었다고 전하는 두양리 은행나무[경상남도 기념물 69호]와 사당인 두방영당, 재실인 두방재가 있으며, 영당 입구에 신도비(神道碑)가 있다. 하동에는 강민첨 장군과 강감찬 장군이 함께 하동을 지날 때 구 시장터에서 머물렀는데, 모기가 너무 많아 모기에게 호통을 치자 모기가 없어졌다는 설화가 전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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