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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석좌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3401414
한자 姜錫佐
영어음역 Gwang Seokjwa
이칭/별칭 성숙(聖叔),중은(重隱)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인·학자
지역 경상남도 하동군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전병철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777년연표보기
활동 시기/일시 1825년연표보기
활동 시기/일시 1835년연표보기
몰년 시기/일시 1853년연표보기
성격 학자
성별
본관 진양

[정의]

조선 후기 하동에서 활동한 학자.

[가계]

본관은 진양(晉陽). 자는 성숙(聖叔), 호는 중은(重隱). 은열공(殷烈公) 강민첨(姜民瞻)의 후손이다. 7대조 강인보(姜仁輔)는 하양현감(河陽縣監)을 지냈으며, 6대조 만송(晩松) 강렴(姜濂)은 남명(南冥) 조식(曺植)의 문인이었다. 고조할아버지는 찰방을 지낸 강림(姜琳)이며, 증조할아버지는 강동열(姜東悅)이고, 할아버지는 강주세(姜胄世)이다. 아버지는 강득후(姜得垕)이며, 어머니는 창녕 성씨(昌寧成氏)이다. 부인은 정이하(鄭履河)의 딸인 진양 정씨(晉陽鄭氏)이며, 그 사이에 4남 5녀를 두었다.

[활동 사항]

강석좌(姜錫佐)[1777~1835]는 이른 나이로부터 과거를 단념하고 위기지학(爲己之學)에 힘썼으며, 『근사록(近思錄)』를 비롯한 성리학(性理學) 서적을 즐겨 읽었다. 항상 몸가짐을 단정히 하였으며, 한 글자라도 건성으로 쓰는 법이 없었다. 옥동(玉洞)에 은거하여 학문을 닦고 학생들을 가르쳤는데, 1825년(순조 25) 족질 강철준(姜澈濬)과 함께 은열공의 영당(影堂)과 재실(齋室)을 중창하였다. 1831년(순조 31) 봄 셋째 아들 강지준(姜之濬)을 데리고 지리산 가례암(家禮巖)에 들어가 고려조의 처사 한유한(韓惟漢)의 시에 차운하여 바위에 새겼다. 이후 이곳에 머물며 한가로이 유유자적하였는데, 「초사(楚辭)」와 「귀거래사(歸去來辭)」를 즐겨 읊곤 하였다.

이외에도 화개(花開)와 쌍계사, 칠불사(七佛寺), 금오산(金鰲山), 금산(錦山) 등을 두루 유람하면서 시를 지었다. 1835년 옥동으로 돌아와 고반서숙(考槃書塾)을 지어 학생들을 가르쳤다. 또한 남전 여씨(藍田呂氏)의 향약을 본받아 동약(洞約)을 만들어 풍속을 교화하였다.

어려서부터 효성이 매우 뛰어나서, 1802년(순조 2) 부모가 모두 병으로 앓아눕자 의관을 벗지 않고 밤낮으로 곁에서 간호했다. 또한 부모가 위독할 적에는 자신의 손가락을 베어 피를 부모의 입에 흘려 넣어 몇 번씩이나 소생시켰다. 부모가 죽은 뒤에는 정성을 다하여 시묘를 살며 3년상을 지냈다.

[학문과 저술]

문집으로 『중은집(重隱集)』이 있다.

[참고문헌]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12.12.24 할아버지 성명 정정 오 : ...할아버지는 강주(姜胄)이다. 정 : ...할아버지는 강주세(姜胄世)이다.
이용자 의견
관** 디지털하동문화대전을 이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해당 내용 수정하였습니다. 감사합니다. 2012.12.24
전** 이 항목의 필자입니다. 강석좌의 할아버지를 강주세(姜胄世)로 수정해주시길 바랍니다. 2012.1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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