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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겸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3401415
한자 金命兼
영어음역 Gim Myeonggyeom
이칭/별칭 경일(景鎰),삼함재(三緘齋)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인·학자
지역 경상남도 하동군 북천면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전병철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635년연표보기
활동 시기/일시 1659년연표보기
몰년 시기/일시 1689년연표보기
출생지 경상남도 산청군 단성면 법물리
거주|이주지 경상남도 하동군 북천면 지도보기
묘소|단소 경상남도 하동군 북천면 천황치
성격 유학자
성별
본관 울산

[정의]

조선 후기 하동 지역에서 활동한 유학자.

[가계]

증조할아버지는 봉산군수를 역임한 백암(白巖) 김대명(金大鳴)[1536~1603]이며, 할아버지는 김용익(金龍翼)이다. 아버지는 장사랑(將仕郞)을 지낸 김충립(金忠立)이며, 어머니는 예조참판을 역임한 지족당(知足堂) 박명부(朴明榑)[1571~1639]의 딸인 밀양 박씨(密陽朴氏)다. 2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처는 익찬(翊贊)을 지낸 죽당(竹塘) 최탁(崔濯)[1598~1645]의 딸이며, 아들은 주담(珠潭) 김성운(金聖運)[1673~1730]이다.

[활동 사항]

김명겸(金命兼)[1635~1689]은 1635년 2월 4일 지금의 경상남도 산청군 단성면 법물리에서 태어났으며, 3세 때 아버지를 따라 진주 여사촌(餘沙村)으로 이거하였다. 23세 때 북천에 거주하던 전주 최씨(全州崔氏)에게 장가들어 25세인 1659년(효종 10) 대야천(大也川)[현 하동군 북천면]으로 옮겨 왔다. 어려서부터 효성과 우애가 지극하였으며, 16세에 아버지 상을 당하자 시묘를 사는 동안 상례를 극진히 행하였다.

겸재(謙齋) 하홍도(河弘度)[1593~1666]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하홍도남명(南冥) 조식(曺植)[1501~1572]의 재전제자(再傳弟子)[제자의 제자]인 송정(松亭) 하수일(河受一)[1553~1612]의 문하에서 수학한 학자로, 인조반정으로 남명학파가 허물어지려 할 즈음에 벼슬에 유혹되지 않고 진주 지역을 지키면서 남명 학문의 정수를 깨쳐 후학들에게 전수하였다.

김명겸하홍도의 조카 설창(雪牕) 하철(河澈)[1635~1704]과 더불어 그 문하에서 명망이 뛰어난 인물로 일컬어졌다. 하홍도가 세상을 떠난 후, 스승을 향사(享祀)하기 위한 종천서원(宗川書院)을 창건하는 데에 중심적 역할을 담당했으며, 상량문을 지었다.

[학문과 저술]

김명겸은 앎에 있어서는 적확하기를 추구하였으며, 행실에 있어서는 끝맺음이 있고자 노력하였다. 평생 독실하고 검약한 삶을 살았는데, 만년에 이를수록 기운이 더욱 평담(平淡)해졌다. 항상 말을 삼가는 것으로써 스스로 경계하여 ‘삼함재(三緘齋)’를 자호로 삼았다. ‘삼함재’는 남명 조식이 지은 「금인명(金人銘)」의 “게다가 세 번이나 봉하였도다[緘復三]”라는 구절에 근거한 것으로 보인다.

금인(金人)은 주나라의 태조 후직(后稷)의 사당 오른쪽 계단 앞에 있었다는 쇠로 만든 사람이다. 공자가 주나라의 태묘에 가서 이 금인을 보았는데, 그 입은 세 번 봉하여져 있고 그 등에는 “옛날 말을 삼간 사람이었다.”라는 말이 새겨져 있었다고 한다. 문집으로 『삼함재집(三緘齋集)』 3권이 있다.

[묘소]

1689년(숙종 15) 사망하였다. 처음에는 사천현 수박동(守樸洞)에 장사를 지냈다가, 이후 하동군 북천면 천황치(天皇峙)로 이장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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