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목차

이일해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3401416
한자 李一海
영어음역 Yi Ilhae
이칭/별칭 여종(汝宗),굴천(屈川)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문인·학자
지역 경상남도 하동군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집필자 전병철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905년 9월 21일연표보기
활동 시기/일시 1943년연표보기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45년연표보기
몰년 시기/일시 1987년 5월 27일연표보기
출생지 경상남도 산청군 단성면 남사리
거주|이주지 경상남도 하동군 옥종면 안계리
거주|이주지 경상남도 진주시 대곡면 마진리
묘소|단소 경상남도 진주시 대곡면 마진리 분토산
성격 학자
성별
본관 재령
대표 관직|경력 대통령비서

[정의]

일제 강점기 경상남도 하동군 지역에서 활동한 학자.

[가계]

본관은 재령(載寧). 고조할아버지는 주화헌(輳龢軒) 이정모(李廷模)이고, 증조할아버지는 소파(蘇坡) 이희곤(李熙坤)이며, 할아버지는 매당(梅堂) 이수안(李壽安)이다. 아버지는 정산(晶山) 이현덕(李鉉德)이며, 어머니는 하한철(河漢徹)의 딸인 진양 하씨(晉陽河氏)이다. 전처는 정석기(鄭奭基)의 딸인 진양 정씨(晉陽鄭氏)이며, 그 사이에 1녀가 있다. 후처는 정한섭(鄭漢燮)의 딸인 영일 정씨(迎日鄭氏)이며, 그 사이에 4남이 있다.

[활동 사항]

이일해(李一海)는 1905년 9월 21일 경상남도 산청군 단성면 남사리에서 태어났다. 어릴 적 할아버지에게 학문을 배웠는데, 총명하여 큰 기대를 받았다. 13세 때 거창 다전(茶田)에 가서 면우(俛宇) 곽종석(郭鍾錫)[1846~1919]를 뵈었다. 같은 해 회봉(晦峰) 하겸진(河謙鎭)[1870~1946]에게 수학하였다.

어릴 적부터 문장을 잘 지었으며, 한유(韓愈)의 문장과 왕사정(王士禎)·소식(蘇軾)의 시를 즐겨 읽었다. 회봉이 “그의 문장은 이미 옛 작가들의 경지에 이르렀다.”라고 칭찬하였으며, 위당(爲堂) 정인보(鄭寅普)는 “남쪽 지역의 선비들 중에서 시는 이일해가 가장 뛰어나다.”라고 평가하였다.

1924년 회봉을 따라 다전에 가서 낭산(朗山) 이후(李垕), 수재(修齋) 김재식(金在植) 등과 함께 면우 선생의 유문(遺文)을 교열하였다. 다음 해 회봉 및 복재(復齋) 조현규(趙顯珪), 지헌(止軒) 정석기(鄭奭基)를 따라 서울로 갔는데, 도중에 대구에 들러 3일간 머물면서 심재(深齋) 조긍섭(曺兢燮), 변산(卞山) 강영만(康榮晩)을 방문하였다. 서울에서 석당(石堂) 권상경(權相經), 희당(希堂) 김수(金銖), 중재(重齋) 김황(金榥) 등과 함께 『면우집(俛宇集)』을 간행하는 일에 참여하였다.

1927년 할아버지를 따라 하동군 옥종면 안계마을모한재(慕寒齋)에서 여러 벗들과 함께 학문을 강마하였다. 1931년 하동군 도량마을로 이거하였다. 1934년 호남의 부안·변산·구례 등지를 유람하였다. 1940년 일본으로 건너가 한 달 남짓 머물다가 돌아왔다. 1942년 경상북도의 영천·안동·하회 등지를 유람하고, 도산서원(陶山書院)·병산서원(屛山書院) 등의 서원에 가서 참배를 드렸다. 1943년 진주의 대곡면 마진리로 옮겨 와 거처하였다.

1945년 광복이 되자 위당 정인보의 추천으로 이승만 대통령의 비서직을 2년간 지냈다. 1954년 부산 동래로 옮겨 와 우거하였다. 1964년 아버지의 상을 당해 상례를 극진히 행하였으며, 아버지의 문집인 『정산집(晶山集)』 8권을 간행하였다. 1987년 5월 27일에 세상을 떠났다.

[묘소]

묘소는 경상남도 진주시 대곡면 마진리 분토산(奔兎山)에 있다.

[학문과 저술]

저서로 『굴천집(屈川集)』 4권이 있다. 『굴천집』에는 부(賦), 사(辭), 시(詩) 등의 작품과 함께 많은 제문(祭文), 고유문(告由文), 봉안문(奉安文), 상량문(上樑文), 재명(齋銘), 비명(碑銘) 등이 실려 있다. 하동의 효자인 김시복(金始復) 및 임진왜란 때 의병으로 활약한 김언량(金彦良)의 사적비문도 찾아볼 수 있다. 이일해(李一海)는 근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한문학(漢文學)의 맥을 유지, 발전시켰다는 점에서 업적을 기릴 만하다.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