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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청학동기」[허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3401464
한자 智異山靑鶴洞記-許穆-
영어의미역 Record of Cheonghakdong, Jirisan Mountain
분야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유형 작품/문학 작품
지역 경상남도 하동군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강정화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저자 생년 시기/일시 1595년연표보기
저자 몰년 시기/일시 1682년연표보기
저술|창작|발표 시기/일시 1640년연표보기
배경 지역 경상남도 하동군 화개면 운수리 지도보기
성격 한문학|유람록
작가 허목(許穆)[1595~1682]

[정의]

1640년 미수 허목이 경상남도 하동군의 청학동 일대를 유람하고 쓴 유람록.

[개설]

「지리산청학동기(智異山靑鶴洞記)」허목(許穆)[1595~1682]의 『미수기언(眉叟記言)』 권28 하편에 수록되어 있다. 허목은 1640년(인조 18) 9월 3일 쌍계사(雙磎寺)불일암(佛日庵)을 유람하고서 「지리산청학동기」를 지었다.

허목의 자는 화보(和甫)·문보(文父), 호는 미수(眉叟)·대령노인(臺嶺老人), 본관은 양천(陽川)이다. 한강(寒岡) 정구(鄭逑)[1543~1620]와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1554~1637]에게 수학하였다. 1650년(효종 1) 정릉참봉에 천거된 후 이조판서를 거쳐 우의정을 지냈다.

17세기 조정의 복상 문제로 예송(禮訟)이 일어나자 남인의 영수로서 당시의 집권 세력인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1607~1689] 등 서인 세력과 치열하게 논쟁하였다. 만년엔 남인이 실각하고 서인이 집권하자 관작을 삭탈당하고 고향에서 저술과 후진 교육에 힘썼다. 저술로 『미수기언』, 『경례유찬(經禮類纂)』, 『방국왕조례(邦國王朝禮)』 등이 있다. 허목은 생전에 자신의 저술을 손수 편찬하여 『기언(記言)』이라 이름 지었다.

[구성]

허목하동군 악양에서 섬진강을 거슬러 올라가 화개에 이른 후 쌍계사 석문(雙磎寺石門)쌍계사(雙磎寺)불일암(佛日庵)을 유람하였다. 특정 지역에 대한 당일 일정의 유람이며, 분량은 길지 않다. 앞부분에 하동의 청학동에 대한 개략적인 설명이 있으며, 말미에 자신의 유람 일정에 대해 짧게 기록하고 있다.

[내용]

「지리산청학동기」의 내용을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남방의 산 중에서 지리산만이 가장 깊숙하고 그윽하여 신산(神山)이라 불리어지고, 그 지리산 중 유독 청학동(靑鶴洞)이 제일 기이하다고 일컬어진다. 청학동쌍계사 석문 위쪽에 있는데, 그곳은 모두 물이 깊고 큰 바위가 많아 사람이 다닐 수 없다. 쌍계사의 북쪽 절벽에서 산굽이를 따라 암벽을 부여잡고 오르면 불일암 앞의 우뚝한 석벽에 이른다. 거기에서 남쪽을 향해 서면 바로 청학동이 굽어보인다.

서남쪽의 석봉(石峯)에는 옛날 학의 둥지가 있었다고 한다. 석봉에 사는 노인들은 “학의 날개는 검고 머리는 붉으며 다리는 자줏빛이지만, 햇빛에 비친 날개를 보면 모두 푸른색이며, 아침에는 빙빙 돌며 날아올라 하늘 높이 사라졌다가 저녁이면 둥지로 돌아오곤 했답니다. 그러나 지금 돌아오지 않은 지가 거의 백 년이 되었습니다”라고 전하고 있다. 그 때문에 봉우리를 청학봉(靑鶴峯), 골짜기를 청학동이라 한다.

남쪽으로는 향로봉(香爐峯)을 마주하고 있으며, 그 동쪽은 3개의 석봉이 늘어서 있다. 그 동쪽의 골짜기는 모두가 층층의 기암절벽이다. 어제 저녁 큰비로 폭포수가 골짜기에 가득했다. 그 대(臺) 위의 돌에는 ‘완폭대(玩瀑臺)’라 새겨져 있고, 그 아래는 못이다.

[의의와 평가]

청학동’이라 일컬어지는 장소로는 여러 곳이 있는데, 조선 시대 선비들에게 있어 청학동불일암 일대로 압축되어 나타난다. 「지리산청학동기」에서 허목불일암 일대를 청학동이라 확언한 부분은 이후 유람자들의 청학동 인식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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