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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두류록」[조식]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3401469
한자 遊頭流錄-曺植-
영어의미역 Record of Sightseeing at Duryusan Mountain
분야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유형 작품/문학 작품
지역 경상남도 하동군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강정화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저자 생년 시기/일시 1501년연표보기
저자 몰년 시기/일시 1572년연표보기
저술|창작|발표 시기/일시 1558년연표보기
배경 지역 경상남도 하동군 화개면 운수리·범왕리 일대지도보기
성격 한문학|유람록
작가 조식(曺植)[1501~1572]

[정의]

1558년 남명 조식이 경상남도 하동군의 청학동 일대를 유람하고 지은 유람록.

[개설]

「유두류록(遊頭流錄)」조식(曺植)[1501~1572]의 『남명집(南冥集)』 권2에 수록되어 있다. 조식은 58살 되던 해인 1558년(명종 13) 4월 10일부터 4월 26일까지 하동군의 청학동 일대를 유람하였다.

조식의 자는 건중(楗仲), 호는 남명(南冥), 본관은 창녕(昌寧)이다. 젊어서 과거에 실패한 뒤 『성리대전(性理大全)』을 읽다가 깨달은 바 있어 학문에 전념하였다. 이황(李滉)[1501~1570]과 더불어 16세기 영남의 양대 학맥을 형성한 대학자로, 성리설에 대한 이론적 탐구보다는 심성 수양에 힘쓰는 실천 유학을 중시하였다. 조식의 학문은 경(敬)·의(義)로 대표되며, 기절(氣節)을 숭상하여 천인벽립(千仞壁立)의 우뚝한 기상을 드러내었다. 저술로 『남명집』이 있다.

조식지리산[1,915m]을 사랑하여 지리산에 거처를 마련하기 위해 10여 차례 지리산을 찾았다. 이러한 사실은 「유두류록」의 말미에서 “덕산동으로 3번, 청학동과 신응동으로 3번, 용유동(龍遊洞)으로 3번, 백운동(白雲洞)으로 1번, 장항동(獐項洞)으로 들어간 것이 1번이었다”고 한 것에서 확인할 수 있다. 결국 조식은 61살 되던 해에 산청 덕산으로 거처를 옮겨 세상을 떠날 때까지 지리산 천왕봉을 우러르며 살았다.

[구성]

하동군의 청학동 유람은 조식의 거주지인 합천군 삼가면을 출발하여 진주→사천→곤양→하동→악양의 삽암(鈒巖)→도탄→악양정(岳陽亭)쌍계사(雙磎寺)불일암(佛日庵)신응사를 둘러보고 귀가하는 일정이다. 유람하는 일정에 따라 날짜별로 날씨는 물론 유람 상황 및 유적지에 대한 설명, 자신의 감회 등을 세세히 기록하고 있다.

동행은 당시 진주목사 김홍(金泓), 청주목사를 지낸 구암(龜巖) 이정(李楨), 고령현감을 지낸 황강(黃江) 이희안(李希安), 이공량(李公亮) 등이다. 이정이희안은 각각 사천과 합천에 거주하던 조식의 절친한 벗이었으며, 16세기 유일(遺逸)로 천거되었던 당대의 뛰어난 학자들이다.

[내용]

산수 유람은 빼어난 경관을 통해 심신을 도야하고, 역사 유적과 선현들의 삶을 회고하여 자신의 학문과 수신을 함양하는 것이 주요 목적이다. 조식은 이 가운데에서 특히 역사 유적지에서 접한 선현의 삶을 통해 수신과 처세에 대해 경각시키고 있다. 「유두류록」에 집중적으로 드러나는 인물은 삽암한유한(韓惟漢), 악양정정여창(鄭汝昌)[1450~1504], 그리고 정수역(㫌樹驛)에서 만난 조지서(趙之瑞)이다.

삽암한유한이 고려 말의 난세를 피해 은거하였던 곳이고, 악양정정여창이 은거하여 학문하던 곳이다. 한유한은 조정의 부름을 피해 달아난 곳을 알지 못하였고, 정여창조지서연산군 때 죽임을 당한 인물이다. 조식은 이들 유적지를 둘러본 후 인재를 제대로 예우하지 못하는 현실과 인재의 불우한 삶을 탄식하였고, 아무리 뛰어난 인재라도 출처(出處)에 있어 시대의 행과 불행은 하늘도 어찌할 수 없다는 것으로써 지식인의 처세를 강조하였다.

나아가 진정한 산수 유람은 물을 보고 산을 보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서 살다 간 사람을 보고 그들의 시대를 살펴서[看水看山看人看世] 삶의 경계로 삼아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더 나아가 조식은 산을 오르는 행위를 구도(求道)의 과정으로 인식하였는데, 유람 도중 접하는 여러 상황을 통해 표현하고 있다.

예를 들어 가파른 산을 오를 때의 힘겨움과 내려올 때의 쉬움을 “선(善)을 좇는 것은 산을 오르는 것처럼 어렵고, 악(惡)을 따르는 것은 산이 무너져 내리는 것처럼 쉽다”고 표현한 것이나, 후세에 이름을 남기기 위해 골짜기 여러 바위에 이름을 새긴 것을 두고서 날아가는 새의 그림자만도 못하다고 하며 “후세 사람들이 날아간 새가 무슨 새인지를 어찌 알겠는가?”라고 일침을 가하는 모습에서 실천적 수양에 철저하였던 조식의 면모를 엿볼 수 있다.

조선 시대 선비들의 지리산 청학동 유람은 대체로 하동군의 화개동 쌍계사불일암, 신흥동의 신응사가 대표적인데, 조식「유두류록」에서 특히 신흥동 계곡의 아름다움을 극찬하였다. 주위 경관의 아름다움에 눈이 휘둥그레지고 넋을 잃을 정도라 하였다. 하동군의 신흥동에 대한 조식의 극찬은 이후 하동 청학동을 유람하는 이들의 유람록에서 자주 언급되기도 한다.

[특징]

조식은 16세기 전반기를 살면서 출처의 대절(大節)을 보인 인물로, 특히 일생 동안 실천적인 학풍을 중시하였다. 이러한 의식은 「유두류록」에서도 엿볼 수 있는데, 유람 도중 접하는 역사적 유적에서 단순히 자연 경관만을 관람하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서 살다 간 역사적 인물의 삶을 회고하고 이를 통해 자신의 삶의 지남(指南)으로 인식하는 유학자적 자세가 돋보인다.

[의의와 평가]

조선 시대 선비들의 지리산 유람은 20세기까지 지속되었다. 이들은 산을 오를 때 변변한 지침서가 없었고, 출발에 앞서 필독하거나 지참하였던 것이라면 앞 시대 선현의 유람록 정도였다. 특히 애독하였던 작품으로는 김종직(金宗直)[1431~1492]과 김일손(金馹孫)[1464~1498], 그리고 조식의 유람록이다. 지리산 유람을 계획하는 선비들은 위의 세 사람의 유람록을 미리 읽었고, 유람록에 나타난 유적지를 지날 때에는 필히 그 기록들을 회상하며 공감대를 형성하려 하였다. 특히 하동군의 청학동 유람에 있어서는 조식「유두류록」이 대표적 작품으로 인식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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