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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류산유행록」[황도익]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3401472
한자 頭流山遊行錄-黃道翼-
영어의미역 Record of Sightseeing at Duryusan Mountain
분야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유형 작품/문학 작품
지역 경상남도 하동군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강정화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저자 생년 시기/일시 1678년연표보기
저자 몰년 시기/일시 1753년연표보기
저술|창작|발표 시기/일시 1744년연표보기
성격 한문학|유람록
작가 황도익(黃道翼)[1678~1753]

[정의]

1744년 이계 황도익이 경상남도 하동군의 청학동 일대를 유람하고 지은 유람록.

[개설]

「두류산유행록(頭流山遊行錄)」황도익(黃道翼)[1678~1753]의 『이계집(夷溪集)』 권13에 수록되어 있다. 황도익은 1744년(영조 20) 8월 27일부터 9월 9일까지 13일 동안 하동군의 청학동 일대를 유람하고 그 감상을 「두류산유행록」으로 기록하였다. 동행자는 황백후(黄伯厚), 이겸(李兼), 황도의(黃道義), 황후간(黃後幹), 이달후(李達厚), 이범(李範), 안경직(安慶稷) 등이다.

황도익의 자는 익재(翼哉), 호는 이계(夷溪), 본관은 창원(昌原)이다. 경상남도 함안군의 안도리 지두촌(池頭村)에서 태어났다. 평생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고 향리에서 학문과 강학에 힘썼다. 1734년(영조 10) 남호(南湖) 가에 고산정(鼓山亭)을, 1739년 성천(聲川)에 돈와(遯窩)를 짓고, 1748년(영조 24) 백이산(伯夷山) 아래에 정사(精舍)를 지어 강학하였다. 교유한 인물로는 밀암(密庵) 이재(李栽), 제산(霽山) 김성탁(金聖鐸), 용와(慵窩) 유승현(柳升鉉), 곡천(谷川) 김상정(金尙鼎), 이휘진(李彙晉) 등이 있다. 저술로 『이계집』이 있다.

[구성]

지리산[1,915m] 유람의 동기를 살펴보면, 현직 관원은 지리산 권역에 부임 후 유람하는 경우가 가장 많고, 재야 학자의 경우 민족의 영산인 지리산에 대한 강한 호기심, 개인적 열망, 또는 지리산 권역에 사는 친·인척이나 벗을 방문하는 기회에 유람을 계획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황도익은 후자에 해당된다. 평생 지리산 권역과 가까운 지역인 함안에 거주한 점, 명성만 익히 들어오던 지리산 청학동에 대한 호기심과 갈망, 전라도 광양에 유배 중인 김성탁을 방문하는 등의 목적으로 청학동 유람을 떠나게 되었다.

이런 경우 일정에 구애받지 않고 여유로운 유람을 하게 되는데, 작품의 구성 및 내용 또한 여유로운 유람만큼이나 풍물의 관광에 초점을 맞춰 나열식으로 서술하고 있다. 날짜별 서술식으로 기록하였는데, 특이한 사항이 없는 경우 날짜와 지나는 곳의 이름만 기록하는 방식을 쓰고 있다. 구체적 유람 일정은 함안을 출발하여 진주→곤양→하동→악양→화개→쌍계사(雙磎寺)불일암(佛日庵)신흥사칠불사(七佛寺)화개장터→광양의 김성탁 유허지에 들렀다가 귀가하였다.

[내용]

황도익은 국내의 명산인 지리산을 둘러보고, 또 당시 광양에 귀양 와 있는 학계의 종장 김성탁을 방문한다는 주요한 두 가지 목적을 가지고 하동군의 청학동으로 출발하였다. 그 때문인지 김성탁과의 만남은 4일 동안 지속되었고, 그 과정에서의 교류하는 모습을 세세히 기록하였다.

황도익 일행은 김성탁의 거처 인근에 머물며 아침저녁 매일 만나 환담을 나누고, 의문 나는 점을 토론하였으며, 도의로써 서로 권면하기를 기약하였다. 황도익은 이 기간 동안의 만남을 두고서 지초와 난초가 있는 방에 들어가 그 향기에 동화되는 정도로는 다 표현할 수 없는 감응이 있다고 표현하였다. 출발에 앞서 돌아오는 길에 다시 들르기로 약속하고, 불일암 꼭대기에서 섬진강을 바라보며 김성탁을 그리워하는가 하면, 실제 귀갓길에 들러 이틀을 머물며 담소를 나누고 시를 짓는 등 함께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 외 유람 도중 접하는 유적에 대한 기록은 눈여겨 볼 만한데, 대강을 기록하면 다음과 같다. 악양의 여러 유적인 소상(瀟湘)·동정(洞庭)·군산(君山) 등의 지명과 악양루(岳陽樓)·고소대(姑蘇臺)·한산사(寒山寺)의 터만 남아 있음을 보고서 황도익은 “이것은 일 만들기 좋아하는 자가 중국의 명승을 본떠 명칭을 정하고 누와 대를 지은 것이리라. 지금은 그 명칭만 남아 있을 뿐이다. 그러나 강산의 빼어남은 변함없이 그대로이다. 축대를 쌓고 누각을 지어 화려하게 꾸민다면 일시에 경관을 바꿀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은 이처럼 황폐해져 있으니, 강산의 흥폐함도 그 사이에 운수가 존재하는 것이 있어서인가?”라 하였다.

정여창(鄭汝昌)[1450~1504]의 유허지인 악양정(岳陽亭)이 황량하게 잡풀만 우거져 초동들의 놀이터가 된 것을 보고는 상심하다가도 “그러나 그 아름다운 덕은 세상에 전파되어 장차 천지와 더불어 전해질 것이다”라는 말로 그 감회를 표출하였다. 쌍계사에 이르러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로 청정하고 기이한 경관을 칭송하면서도, 훼손된 건물이 많아 사찰의 규모를 갖추지 못하는 당시 상황을 그대로 묘사하였다.

선현들의 산수 유람은 학문하는 여정으로 곧잘 비유되곤 한다. 곧 산을 오르는 힘든 여정을 학문을 하는 고단함으로 비유해서, 그 어려움을 견디고 또 느긋한 마음으로 차근차근 산을 오르다 보면 어느덧 정상에 도달할 수 있듯, 학문 또한 목표를 세우고 고단하고 힘들더라도 여유로운 마음으로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나아가야 목표 지점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황도익 일행은 칠불사를 향해 가는 여정에서 일정에 쫓겨 무리하게 걸었는데, 그날 밤 이를 두고서 “오늘의 일정은 이곳저곳 바쁘게 돌아다녀 촉박함이 있는 듯하다. 산을 유람하는 기상은 이런 것이 전혀 아니다. 그러니 산을 보며 깨닫는 오묘함을 얻을 수 있으랴?”라고 하여, 성찰의 기회를 가지고 있다.

[의의와 평가]

「두류산유행록」을 통하여 18세기에 일생 출사하지 않고 재야에 은거하였던 지식인의 시폐(時弊)에 대한 비판 의식을 엿볼 수 있으며, 조선 초기부터 나타나는 하동의 여러 유적들이 18세기 말에 이르면 대부분 훼손되어 그 터만 남아 있는 현상을 파악할 수 있다.

현재까지 발굴된 18세기 지리산 유람록은 20편 정도이다. 이 시기는 경상우도를 중심으로 지리산 인근에 은거하던 몇몇 인물에게서 주로 나타나며, 당시 정치권력에서 밀려나거나 재야에 은거한 지식인으로서의 불만을 해소하거나 유람 도중 인근의 벗을 찾아 위로받기 위한 목적이 강하였다. 「두류산유행록」은 함안 출신의 유학자가 쓴 작품으로, 당시 재야 지식인의 의식을 엿볼 수 있는 좋은 자료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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