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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두류산기」[김지백]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3401487
한자 遊頭流山記-金之白-
영어의미역 Record of Sightseeing at Duryusan Mountain
분야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유형 작품/문학 작품
지역 경상남도 하동군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강정화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저자 생년 시기/일시 1623년연표보기
저자 몰년 시기/일시 1671년연표보기
저술|창작|발표 시기/일시 1655년연표보기
배경 지역 경상남도 하동군 화개면 운수리·범왕리지도보기
성격 한문학|유람록
작가 김지백(金之白)[1623~1671]

[정의]

1655년 담허재 김지백이 경상남도 하동군의 청학동을 유람하고 지은 유람록.

[개설]

「유두류산기(遊頭流山記)」는 『담허재집(澹虛齋集)』 권5에 수록되어 있다. 김지백(金之白)[1623~1671]은 1655년(효종 6) 10월 8일부터 10월 11일까지 나흘간 하동군의 청학동 일대를 유람하였다. 유람록 말미에 의하면, 나흘간의 유람에서 일행들이 지은 100여 편의 한시를 1권의 시집으로 만들면서 기문을 짓게 되었다고 한다.

유람 일정은 전라북도 남원을 출발하여 구례 화엄사(華嚴寺)→연곡사(燕谷寺)→화개 쌍계사(雙磎寺)불일암(佛日庵)→신흥동→칠불암(七佛庵)에 들러 옥부대(玉釜臺)를 둘러보는 것으로 끝나며, 이듬해에 다시 산행할 것을 기약하였다. 동행자는 서국익(徐國益), 이자원(李子遠), 한여근(韓汝謹), 노운경(盧雲卿), 서대숙(徐大叔) 등이다.

김지백의 자는 자성(子成), 호는 담허재(澹虛齋), 본관은 부안(扶安)이다. 신독재(愼獨齋) 김집(金集)[1574~1656]의 문인이며, 오이정(吳以井)[1619~1655], 송시열(宋時烈)[1607~1689], 송준길(宋浚吉)[1606~1672] 등과 교유하였다. 1658년(효종 9) 천거를 받았으나 나아가지 않고 평생 학문에만 정진하였다. 저술로 『담허재집』이 있다.

[구성]

앞부분은 지리산[1,915m]에 대한 개략적인 설명을 하고 곧바로 하동의 청학동에 대한 세세한 설명을 덧붙이는 것으로 시작한다. 최치원(崔致遠)[857~?] 관련 일화 및 각종 유적지 소개, 청학 이야기, 그리고 이 명승을 찾아 역대로 수많은 사람들이 유람하였음을 강조하였다. 이후의 글쓰기는 유람록 체재에 따라 일정별로 유람 상황과 총평을 산문 형식으로 수록하고 있다. 경로상의 기록인 본문에 비해 시작 부분과 말미의 총평이 볼 만하다.

[내용]

김지백(金之白)[1623~1671]은 자신의 거처가 하동군의 청학동과 인접한 남원임에도 아직 한 번도 유람하지 못하였는데, 마음속의 염원을 풀기 위해 유람에 나선다고 하였다. 전라남도 구례를 거쳐 청학동을 찾는 일정인지라 구례 지역의 유적인 대흥사(大興寺)와 연곡사, 천은사(泉隱寺) 등에 대한 기록이 보인다. 쌍계사를 거쳐 불일암에 오른 김지백불일폭포를 일러 중국의 여산폭포(廬山瀑布)나 우리나라 송도의 박연폭포와 견줄 만하다고 칭송하였다. 김지백의 언급에 의하면, 당시 지리산에 산재한 사찰은 약 370개 정도라 하였다.

[의의와 평가]

하동군 화개면의 화개동을 거쳐 청학동을 찾아가는 과정은 두 가지이다. 남원, 순창이나 곡성에서 출발하는 유람자는 구례를 거쳐 화개로 진입하였고, 합천과 진주에서 들어가는 유람자는 하동군 악양과 하동을 경유하여 화개로 진입하였다. 「유두류산기」는 전자의 경우에 해당하는 대표적 작품으로, 이외에도 조위한(趙緯韓), 김도수(金道洙)[1699~1733], 양회갑(梁會甲) 등이 이 코스로 청학동을 찾았다.

지리산은 신선이 사는 곳으로 인식되었을 뿐만 아니라, 곳곳의 빼어난 절경으로 인하여 지식인들이 가슴속의 울분을 씻기 위해 찾아드는 이상적 장소였다. 조선 시대 유학자들은 신선 세계에 대한 흥취를 누리기 위해 지리산 청학동을 찾았고, 그래서 자신들의 유람을 선유(仙遊)라 일컬었으며, 지리산을 선경(仙境)으로 표현하였다. 이때의 유람은 대체로 쌍계사, 불일암, 최치원 등으로 대표되는 하동 청학동과 신흥동, 삼신동 방면으로 이루어졌다.

「유두류산기」는 17세기 호남 지역에 은거하던 재야 지식인이 지리산 청학동을 유람한 기록으로, 당시 호남 학자의 지리산 인식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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