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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5 광복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3401542
한자 八一五光復
영어의미역 August 15th Independence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경상남도 하동군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장상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사건

[정의]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태평양 전쟁 패전을 계기로 경상남도 하동군을 포함한 대한민국 전역이 일제의 식민 지배로부터 벗어난 일.

[개설]

1945년 8월 15일 해방을 맞이하여 우리 민족의 당면 과제는 자주적 민족 국가 수립을 통한 일제 잔재의 청산과 봉건적 유제의 철폐에 있었다. 정치적으로는 자주적 민족 국가를 건설함으로써 외세에 의한 종속을 탈피하고, 친일파와 민족 반역자를 숙청하여 식민지 통치 구조를 타파하는 것이 과제였다.

경제적으로는 식민지 지배의 물적 기반을 청산하고 자립적 민족 경제를 창출하며, 반봉건적 소작 관계를 청산하여 근대적 농업 생산 관계를 창출하는 것이 과제였다. 또한 사회·문화적으로는 신분 관계와 남존 여비 등 전근대적 사회관계를 청산하는 사회적 해방의 과제가 있었다. 해방을 계기로 활성화된 민중의 정치적 역량은 이러한 민족적 과제 수행의 가능성을 보여 주었다. 전국적인 조직망을 갖춘 건국준비위원회와 인민위원회의 결성은 그러한 길로의 움직임이었다.

그러나 8·15 광복은 우리 민족의 힘이 아닌, 연합군에 패배한 일본의 무조건 항복으로 이뤄진 것이었고, 이에 따라 미군과 소련군이 남북한 지역에 군정을 실시함으로써 다시 종속과 분단의 아픔을 겪게 되었다. 미군이 점령군으로 남한에 진주하여 미군정이 실시되고, 38선 이북에서는 소련군이 8월 20일 원산항을 통해 상륙하여 북한 지역을 점령하고 군정을 실시하였다.

[경과]

경상남도 하동군 지역에서 거주하고 있던 일본인 700여 명은 1945년 8월 20일 사천비행장으로 떠났다. 그리고 9월 10일 미군 정세 조사단이 하동에 와서 좌익 세력의 동태를 살폈고, 9월 17일에는 일본인 경상남도지사가 미군정의 해리스 준장으로 교체되었다.

치안 유지회가 발기 대회를 가진 것은 8월 16일로, 8월 19일에는 군민 대회를 열어 치안 유지회를 결성했다. 초기에는 좌익 조직의 결성이 빨리 이루어졌다. 8월 27일 건국준비위원회 하동지부에 이어 9월 15일에는 하동군 인민위원회가 결성되었다. 그러나 미군의 군사력이 우익 세력을 뒷받침해 주었기에, 1946년 4월 좌익 세력이 대대적인 탄압을 받고 난 후 대한독립촉성국민회 하동군청년동맹 등 우익 조직들이 조직되어 활동하기 시작했다.

[의의와 평가]

8·15 광복 이후 한반도가 미국과 소련 양군에 의해 분할, 점령당하면서 우리 민족은 주체적 노력에 기초한 과제 달성의 길을 차단당하며 갈등과 대립의 소용돌이 속으로 휩쓸려 들어갔다. 민족 자주와 사회 개혁을 요구한 좌익 세력이 민중의 지지를 상당히 많이 받고 있던 당시 남한의 정치적 역학 관계 하에서 자본주의 시장 경제로의 편입과 친미 반공 국가 수립이라는 미국의 목표가 마찰 없이 달성되기는 어려웠기 때문이다. 이에 미군정은 남한 내의 자생적인 정치 세력을 부정하고 이를 대체할 친미 세력을 부식(扶植)시키는 것을 당면한 목표로 삼았으며, 이것은 기존의 정치 세력과의 마찰과 대립을 초래했다. 이러한 대립과 갈등이 1950년 6·25 전쟁의 싹을 제공하게 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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