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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3401546
한자 文益漸崇慕碑
영어의미역 Monument for Mun Ikjeom
분야 역사/근현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비
지역 경상남도 하동군 북천면 직전리 1083-3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정연가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건립 시기/일시 1935년 10월연표보기
관련 인물 생년 시기/일시 1329년연표보기
관련 인물 몰년 시기/일시 1398년연표보기
현 소재지 경상남도 하동군 북천면 직전리 1083-3 지도보기
성격 숭모비
관련 인물 문익점(文益漸)[1329~1398]|문원근(文愿根)|문대동(文大東)|문영선(文永善)|문춘근(文春根)|이우섭
재질 화강암
크기(높이, 너비, 두께) 143㎝[높이]|45㎝[너비]|20㎝[두께]
소유자 강성 문씨 종중
관리자 문병이

[정의]

경상남도 하동군 북천면 직전리에 있는 일제 강점기 문익점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

[개설]

문익점(文益漸)[1329~1398]은 고려 말기의 정치가이자, 창왕 때 좌사의(左司議)로서 왕 앞에서 강론을 한 뛰어난 학자이기도 하다. 호는 삼우당(三憂堂), 자는 일신(日新)이다. 강성현(江城縣)[현 경상남도 산청군]에서 문숙선(文淑宣)의 아들로 태어났다. 1360년(공민왕 9) 문과에 급제하여 1363년(공민왕 12) 사신 이공수(李公遂)의 서장관으로 원나라에 다녀왔다.

귀국할 때 목화씨를 붓대에 몰래 숨겨 와 장인 정천익(鄭天益)과 함께 시험 재배에 성공한 뒤 널리 보급하여 백성들이 무명옷을 입을 수 있게 한 역사적 인물이다. 또한 정몽주(鄭夢周)·이색(李穡) 등과 성리학을 제창하였다. 태종 때 참지정부사(參知政府事) 강성군(江城君)에 추증되고, 세종 때 영의정 증직과 함께 부민후(富民候)에 추증되었으며, 충선공(忠宣公)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건립 경위]

문익점 숭모비(文益漸崇慕碑)문익점의 후손인 문원근(文愿根), 문대동(文大東), 문영선(文永善), 문춘근(文春根) 등이 뜻을 모아 1935년 10월 강성 문씨(江城文氏) 집성촌인 직전마을 앞에 세웠다. 조상의 얼을 현창하여 일제의 지배 아래에서도 민족정신을 일깨우고, 후세에 귀감이 되게 할 목적에서 건립하였다.

[위치]

하동군 북천면 직전리 1083-3번지 직전마을 앞 목포~부산 간 국도 2호선 도로변에 위치하고 있다. 마을 앞에 북천천이 흐르고, 동편으로 3㎞ 지점에 북천면사무소와 북천우체국, 경전선 철도 북천역이 있다.

[형태]

비신(碑身)은 규형(圭形)의 흑요암(黑曜岩)이며, 용무늬 모형의 네모진 덮개가 얹혀 있고, 화강암으로 조각된 거북 모양의 기단 위에 세워져 있다. 비석의 크기는 높이 143㎝, 너비 45㎝, 두께 20㎝이다.

[금석문]

비석의 정면에 ‘강성군 삼우당 문선생 숭모비(江城君三憂堂文先生崇慕碑)’라 음각으로 새겨져 있는데, 글자 크기는 가로, 세로 각각 15㎝이다. 비석의 옆면과 뒷면에 문익점의 훈적(勳績)과 비를 세우게 된 동기를 새겼는데, 글자는 가로, 세로 각각 2㎝이며 끝머리에 지은이와 건립 연대를 새겼다. 비문은 이우섭이 지었다.

[현황]

비석의 주변을 벽돌 담장으로 둘러 훼손을 막고 있는 등 후손들이 정성으로 관리하여 상태가 매우 양호하다.

[의의와 평가]

문익점 숭모비는 고려 말의 유학자이며 정치가로 국정의 중심에서 활약하였을 뿐 아니라 목화씨를 들여와 백성들의 의복 혁명을 이루게 한 문익점의 애국 애족 정신을 후세에 전하는 데 큰 의미가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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