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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3401618
한자 金始復孝行事蹟碑
영어의미역 Monument to the Filial Piety of Gim Sibok
이칭/별칭 구정 함창김공 효행사적비
분야 종교/유교,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비
지역 경상남도 하동군 양보면 지례리 1170-1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박용규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건립 시기/일시 1921년연표보기
현 소재지 경상남도 하동군 양보면 지례리 1170-1 지도보기
성격 사적비
관련 인물 김시복(金始復)|이일해(李一海)
재질 비[오석(烏石)]|이수와 거북 좌대[화강암]
크기(높이, 너비, 두께) 173㎝[높이]|45㎝[너비]|20㎝[두께]
소유자 함창 김씨 문중
관리자 함창 김씨 문중

[정의]

경상남도 하동군 양보면 지례리에 있는 일제 강점기 김시복(金始復)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

[개설]

김시복은 본관이 함창(咸昌)이며, 자는 성지(聲之), 호는 구정(龜亭)이다. 형조판서 김남중(金南重)의 후손이다. 1778년(정조 2)에 태어나 열 살에 『효경(孝經)』과 『논어(論語)』를 통달하였다. 타고난 성품이 순박하고 후하며 강직하고, 부모를 효로써 봉양하였다. 갑작스럽게 상(喪)을 당하여 슬픔에 겨를이 없었으나 예를 다하여 장례를 치르고자 하였는데, 당시 세력 있는 가문이 장지에 장례를 치르지 못하게 관에 소송을 제기하였다.

김시복은 10년이 넘도록 좋은 옷을 입지 않고 맛있는 음식도 마다하며 스스로 죄인이라 자처하였다. 태장(笞杖)으로 볼기를 치는 형벌을 당하여 살갗이 찢어지고 문드러져 넓적다리에 구더기가 일고 걸음을 걷지 못해 사경을 넘나들었으나 죽기를 작정하고 10여 년을 저항하여 소송에 이길 수 있었다.

[건립 경위]

보통 사람은 3년 시묘도 행하기 어려운데 권세 가문에 맞서 10년 세월을 견뎌냈으니, 김시복은 하늘이 낸 효자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나라의 운이 다하여 포상하는 은전은 받지 못하였는데, 마을 사람과 후손들이 그 효행을 기려 1921년에 비석을 세웠다.

[위치]

김시복 효행 사적비(金始復孝行事蹟碑)하동군 양보면 지례리 1170-1번지 만지마을 어귀에서 지방도 1003호선을 따라 진교 방향 30m 지나는 지점 도로변에 위치해 있다.

[형태]

몸돌은 규형(圭形)으로 오석(烏石)이며, 이수(螭首)와 거북 좌대는 화강암이다. 비 주변에 12개의 사각 기둥을 둘렀다. 비석의 크기는 높이 173㎝, 너비 45㎝, 두께 20㎝이다.

[금석문]

묘비 정면에 ‘구정 함창 김공 효행 사적비(龜亭咸昌金公孝行事蹟碑)’라 새겨져 있다. 비문은 재령 이씨(載寧李氏) 이일해(李一海)가 지었다.

[의의와 평가]

김시복 효행 사적비는 지극한 효로 부모를 봉양하고, 세력 있는 가문과 10여 년의 송사에도 굴복하지 않은 김시복의 효행 사례를 담은 것으로 후세인들에게 교훈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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