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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창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3401694
한자 漕倉
영어의미역 storage for collected goods from taxation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상남도 하동군
시대 고려/고려,조선/조선
집필자 박용국

[정의]

경상남도 하동군에서 거두어들인 세곡을 모아 두던 창고.

[개설]

조창(漕倉)은 조운창(漕運倉)의 줄인 말로 조선 시대 지방의 각 고을에서 국가에 바쳐야 할 세금으로 징수한 곡식 등 세곡을 서울로 운송하기 위하여 해안이나 강변에 설치한 창고이다. 전국에 열 개의 조창이 있었다. 1894년[동학 농민 운동] 이후 조창이 폐지될 때까지 매년 음력 3월 25일부터 5월 15일까지 세곡을 모아 상납했는데, 이 때 이곳에서 각 고을 관원이 모여 조곡이 조정에 무사히 안착하기를 기원하는 제사를 조운 전에 지냈다고 한다.

[설치와 특징]

조선 건국 이후 지방의 세곡을 서울로 수송하기 위하여 전국에 열 개의 조창을 설치하였다. 그러나 하동 지역은 따로 조창이 설치되지 않았으며, 이웃 진주목의 해운창인 가산창(駕山倉)[현재 경상남도 사천시 축동면 가산리 935번지]에서 거두어 경창으로 옮겼다.

다만 하동 지역에는 읍창·두곡창(豆谷倉)·고읍창(古邑倉)·해창(海倉)·목도창(牧島倉)이 있어 하동의 세곡을 모아 임시로 보관하였다. 또한 진주목의 속현이었던 악양현은 진주와 거리가 멀어 노고가 많다고 하여 1518년(중종 13) 따로 창을 설치하기도 했었다. 악양현은 1702년(숙종 28) 진주목에서 하동으로 분속되었다.

하동의 세곡은 경상남도 서부 지역 8읍[진주, 사천, 곤양, 하동, 단성, 남해, 고성 서북면, 의령 서남면 등]과 함께 가산창으로 모아 진주목사가 감봉(監捧)하고 적량첨사가 경창에 납세하였다. 가산창은 조선 후기 조선 수가 20척이었다.

[관련 기록]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권31, 경상도 하동현의 창고조(倉庫條)에 “읍창·두곡창(豆谷倉)은 섬강 가에 있다. 고읍창(古邑倉)은 양경산(陽慶山) 남쪽에 있다. 해창(海倉)은 사근포(沙斤浦)에 있다. 목도창(牧島倉)은 목도에 있다”라고 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권30, 경상도 진주목의 속현조에 “악양현(岳陽縣) 주 서쪽 1백 21리에 있다. 본래 신라의 소다사현(小多沙縣)이다. 경덕왕이 지금 명칭으로 고쳐서 하동군에 예속시켰던 것인데 고려 현종 때에 내속시켰다. 정덕(正德) 무인년에 악양현화개현은 진주와 거리가 멀어서, 백성들이 관곡(官穀) 출납에 노고가 많다고 하여 여기에다 창(倉)을 설치하였다”라고 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권30, 경상도 진주목의 창고조에는 “읍창·군향창(軍餉倉)·제민창(濟民倉) 모두 읍내이다. 가산창(駕山倉)은 우조창(右漕倉)이라고 하는데, 남쪽으로 40리 바닷가에 있다. 영조 경진년에 관찰사 조엄(趙曮)이 조정에 아뢰어 설치하여, 진주·곤양·하동·단성·남해·사천 및 고성 서북면, 의령 서남면의 전세(田稅)·대동(大同)을 거두어 수로로 서울에 이르렀다. 진주목사 감봉 적량첨사(晉州牧使監捧赤梁僉使)가 거두어 바쳤다”라고 하였다.

[참고문헌]
이용자 의견
김** 목도창은 1608년에 설립된 통영의 외창으로 통영곡의 수납을 위한 곳이었다.18세기 말엽의 경우 업무처인 좌기청(3), 색리와 고지기가 머문 색고직소(5), 창고인 고사(8) [ *( )는 칸수]를 두었고, 둔전의 운영도 하였다. 자세한 것은 필자의 논고를 참조 바람. 2019.0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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