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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3401695
한자
영어의미역 Memorial Stone|Tombstone|Monument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상남도 하동군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박용국

[정의]

인물이나 사적(事蹟)을 기념하기 위해서 돌·금속·도기·나무 등에 글을 새겨 세워놓은 경상남도 하동군의 여러 기념물.

[개설]

비는 재료에 따라 석비(石碑)·목비(木碑)·철비(鐵碑) 등으로 분류된다. 비는 흔히 비석이라고 하듯이 현존하는 기념물 형태의 비는 거의 모두 석비이다. 석비는 형태에 따라 비(碑)[위가 네모난 형태]와 갈(碣)[위가 둥근 형태]로 나눌 수 있으나 총칭하여 비갈(碑碣)이라고 하며, 내용에 따라 능비(陵碑)·순수비(巡狩碑)·탑비(塔碑)·묘비(墓碑)·신도비(神道碑)·애민비(愛民碑)·영세 불망비(永世不忘碑)·사적비(事蹟碑)·정려비(旌閭碑)·송덕비(頌德碑)·기적비(紀蹟碑) 등으로 분류할 수 있다.

중국 주대(周代)부터 석각(石刻)의 형태로 시작되어 한대(漢代)를 거쳐 당대(唐代)에 이르러 비로소 이수(螭首)·제액(題額)·비신(碑身)·귀부(龜趺) 등을 갖춘 전형적인 석비 형식이 이루어졌다. 우리나라의 경우 삼국 시대에는 자연석, 또는 모가 난 석재에 비면만 다듬어 비문을 새겼으나 통일 신라 시대가 되면 중국 당대의 석비 형식에 따라 네모난 대좌에 귀부를 안치하고 그 위에 비좌(碑座)와 비신을 차례로 얹은 다음 이수로 장식하였다.

평안남도 용강군에 있는 85년의 점제현 신사비(秥蟬縣神祠碑)가 가장 오래되었고, 다음으로 고구려 비로 압록강 집안(輯安)의 광개토왕릉비[414]와 충주의 중원고구려비, 신라 비로 포항 냉수리비[504]와 포항 중성리비[501] 및 단양 신라 적성비[551] 등이 초기의 것 들이다.

통일 신라 시대의 석비는 이수와 귀부만 전하는 왕릉의 묘비, 고승(高僧)의 생애와 업적을 기록한 탑비가 대부분을 차지한다. 대표적인 예로, 능비로는 태종무열왕릉비의 귀부와 이수, 성덕왕릉 귀부, 흥덕왕릉비의 귀부가 있으며, 불교 관련 탑비로는 무장사지 아미타조상탑비, 쌍계사 진감선사대공탑비, 화순 쌍봉사 철감선사탑비의 이수 등이 있다. 고려와 조선 시대에는 탑비를 비롯하여 묘비와 신도비가 많이 세워졌다. 이러한 금석문(金石文)은 거의 대부분 당대의 사실을 전하고 예술을 표현하고 있으므로 역사학·문자학·서예학 만이 아니라 미술사 연구에서도 매우 귀중한 자료이다.

하동 지역의 비는 887년(정강왕 2)에 건립된 쌍계사 진감선사대공탑비를 제외하면 임진왜란 이전의 것에 해당하는 묘비와 탑비가 없다. 하동 지역의 비는 대부분 조선 시대 말기와 근세에 세워진 것으로 주로 효자비·정려비·유적비 등 기적비(紀蹟碑)로 분류될 수 있는 것들이다. 따라서 시대적 분류는 의미가 없으며, 내용에 따라 분류하여 정리할 수밖에 없다.

[탑비]

하동 지역의 비로 가장 오랜 된 것은 경상남도 하동군 화개면 운수리 쌍계사 경내에 있는 쌍계사 진감선사대공탑비[국보 제47호]이다. 쌍계사 진감선사대공탑비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탑비로 887년에 건립되었으며, 거북받침돌 비신 및 이수형의 덮개돌이 완전하게 남아 있다. 탑비는 귀부와 이수가 화강암, 비신이 흑대리석으로서 전체 높이가 3m 63㎝, 탑신 높이가 2m 2㎝, 폭이 1m, 두께가 23㎝이다.

거북받침돌은 머리가 용으로 꾸며져 있고, 등이 6각의 홑겹 무늬로 크게 표현되었다. 대체로 통일 신라 후기의 특징을 보이고 있다. 거북받침돌의 중앙에 비좌를 마련했는데, 4면에 구름무늬가 있고 위에는 비신에 맞게 구멍이 뚫려 있다. 이수형의 덮개돌에는 4면에 여의주를 놓고 서로 다투는 용이 힘차게 조각되어 있다. 덮개돌의 전면 중앙에 방형으로 깊이 판 제액에 ‘해동고진감선사비’의 글귀가 새겨져 있다. 비문은 최치원(崔致遠)이 짓고, 승려 환영(奐榮)이 새겼으며, 글자 크기가 2.3㎝, 글자 수가 2,423자이다.

쌍계사 진감선사대공탑비는 비신의 일부분이 마멸되어 있으나 여러 탁본과 판본이 전하고 있어 비문 내용은 완전하게 알려져 있다. 비문의 내용은 진감선사 혜소(慧昭)[774~850]의 입당 구법 과정과 830년 귀국 이후 지리산 화개곡에서 선법을 펼친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비의 서문에 유교와 불교 사상이 근본은 다르지 않다고 하고, 본 내용에서도 노장 사상을 보여주는 용어와 개념들을 다수 사용하여 삼교를 하나로 파악하는 찬자 최치원의 사상적 입장과 아울러 당시 지식인들의 사상 경향을 시사해 준다. 또한 쌍계사의 유래, 범패의 전래와 유포, 효소왕(孝昭王)의 피휘 사실 등도 전하고 있다.

[신도비]

신도비는 고인(故人)을 기리기 위하여 풍수지리상 무덤 남동쪽의 길가에 세운 비석이다. 중국에서 비롯되었으며, 우리나라에는 고려 시대부터 세운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전하는 것이 없다. 조선 시대 들어와서 태조의 건원릉(健元陵)[조선 태조릉]과 세종의 영릉도 넓은 의미로 신도비로 분류할 수 있으나 문종이 왕릉에 비를 세우는 것을 금지한 이후 주로 2품 이상을 지낸 인물에 한하여 세우는 것으로 제도화되었다. 신도비는 대체로 전액(篆額)이나 제액(題額)에서 신도비라고 그 명칭을 밝히고, 해당 인물의 가계(家系), 행력(行歷), 후손(後孫), 명(銘), 찬자(撰者)·서자(書者)·전자(篆者)를 기록하는 순서로 구성된다.

하동 지역에 분포하고 있는 신도비는 강민첨 신도비가 거의 유일하며, 이것조차 후대에 세운 것이다. 강민첨 신도비하동군 옥종면 두양리 두방영당[두방재] 입구에 있는 고려 병부상서 강민첨(姜民瞻)을 기리기 위해서 1910년 후손과 지역 유림들이 중심이 돼 세운 석비이다.

진주 강씨 은열공파 파시조인 강민첨은 1018년(현종 9) 거란의 소배압이 10만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오자 강감찬(姜邯贊) 장군과 함께 출전하여 적군을 대파하는 데 큰 공을 세워 1019년(현종 10) 추성치리 익대공신 금자흥록대부 병부상서 상주국 천수현 개국남(推誠致理翊戴功臣金紫興祿大夫兵部尙書上柱國天水縣開國男)을 제수 받고 식읍(食邑) 삼백호(三百戶)를 하사 받았던 인물이다.

강민첨의 신도비는 높이가 255㎝, 폭이 75㎝이며, 겹처마 팔작지붕 목조 기와로 된 보호각을 마련해 사면을 홍살로 막았다. 신도비는 1910년 경연참찬관(經筵參贊官) 면우 곽종석(郭鍾錫)이 찬하였고, 제학(提學) 이승우(李勝宇)가 썼다. 전(篆)은 조종필(趙踵弼)이 썼다. 비문이 앞면부터 시작해 별도의 제목은 없고 두전은 ‘고려병부상서 태자태부 은열공 강민첨 신도비’라고 되어 있다.

[묘갈(墓碣)]

조지서(趙之瑞)의 묘비는 경상남도 하동군 옥종면 대곡리 614-2번지에 있는 조선 중기 문신 조지서를 기리기 위해서 남명(南冥) 조식(曺植)과 후손이 세운 것으로 보인다. 조지서[1454~1504]는 본관이 임천(林川), 자가 백부(百符), 호가 지족정(知足亭), 또는 충헌(忠軒)이며, 조지서의 증조부가 조익(趙益)이며, 조부가 직장(直長) 조민원(趙敏原)이다. 아버지는 사헌부감찰을 지낸 조찬(趙璨)이며, 어머니는 생원 정참(鄭叅)의 딸이다. 조지서의 누이가 남명 조식의 할머니이다.

1474년(성종 5)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승문원 정자에 제수되었다. 1479년 문과 중시에 1등으로 급제하여 형조정랑에 발탁되고, 홍문관 교리·응교를 거쳐, 시강원 필선·보덕으로서 세자의 사부가 되었다. 1495년(연산군 1) 창원부사로 파견되었다가 곧 사직하고, 지리산에 은거하여 학문에 전념하였다. 1504년(연산군 10) 갑자사화가 일어나, 세자 때 조지서의 풍간(諷諫)함과 집요한 진강(進講)을 혐오했던 연산군에 의해서 참수되었다. 1506년(중종 1) 중종반정 후 관작이 회복되고 통정대부 승정원 도승지에 추증되면서 신원(伸寃)되었다.

지족당 조지서의 삶이 간략하게 잘 나타난 조지서의 묘비는 2009년 2월 19일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458호로 지정되었다. 비신의 후면 글씨는 대부분 판독이 되나 전면 및 좌우 측면의 글씨는 거의 판독이 불가능한 상태다. 따라서 비문을 지은 사람과 글씨를 쓴 사람이 누구인지 확인할 수 없다. 그러나 비문의 찬자가 남명 조식이라는 사실은 『남명집(南冥集)』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묘비는 사암으로 된 대좌와 비신 및 가첨석의 형태이다. 비좌에는 세로 면에 3개의 연판(蓮瓣), 모서리마다 1개씩의 연판이 장식되어 있으며, 가첨석 중앙에는 끝을 뾰족하게 처리한 구상의 보주가 장식되어 있다. 전후면 좌우에는 고사리 문양과 같은 운문이 장식되어 고졸함을 더하고 있다. 가첨석 아랫면은 부드러운 곡선을 유지하고 있어 안정감을 더한다.

기타 묘비로 조선 숙종 때 태어나 영조 때 효자로 명성을 얻어, 가선대부 절충장군 용양위부호군을 증직 받은 김정규의 효행을 새겨 세운 김정규 묘비(金挺畦墓碑)도 있다.

[유허비]

겸재 하선생 유적비남명 조식의 학문을 사숙한 겸재(謙齋) 하홍도(河弘度)의 업적을 기린 비석으로, 하홍도가 태어난 마을 입구에 1997년 건립하였다.

세칭(世稱) ‘남명선생 후 일인자(老先生後一人)’라고 불렸던 겸재 하홍도는 옥종 사람이다. 하홍도는 1593년(선조 26) 현재 하동군 옥종면 안계리에서 태어났다. 거처하는 곳에 ‘겸재(謙齋)’라고 스스로 호를 지어 벽 위에 글씨로 써두고 ‘겸괘도(謙卦圖)’와 그와 관련한 해설을 그림으로 만들어 아래에 붙였다. 겸재가 ‘겸손할 겸’자를 호로 선택한 것은, “겸손하고 또 겸손하여 낮은 자세로서 스스로 그 덕을 기르고자”해서이다. 1666년(현종 7) 4월 병으로 세상을 떠나니 향년 74세였다. 1679년(숙종 5)에는 지방 유림들이 학덕을 기리기 위해 옥종의 종천서원에 모셨다.

겸재 하선생 유적비는 1993년 구한말 선비 중재 김황의 문인인 진와 이헌주가 지었다. 비문 첫머리에 “겸재 하선생이 세상을 떠난 지 수백 년에 신후(身後) 문자는 다 이루어졌다. 금년 봄에 자손들이 사림들과 더불어 서로 의논하여 큰 비석에 선생의 사적을 기록하여 안계 마을에 세울 계획을 하니 이 마을이 선생이 탄강한 땅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겸재의 주손 하영문(河永文)과 후손 삼로(三魯) 하만도(河萬道)가 중심이 돼 지역 유림들과 상의하여 비석을 건립하였다.

기타 유허비로는 군자감봉사 증감정 이공 유허비(軍資監奉事贈監正李公遺墟碑), 김두서 유적비(金斗瑞遺蹟碑), 강성 문씨 해관처사 휘 욱려공 유허비(江城文氏海觀處士諱郁呂公遺墟碑), 통정대부 운계공 유허비(通政大夫蕓溪公遺虛碑), 선무원종공신 증통정대부 승정원좌승지 겸경연참관 낭선재김공 유허비(宣武原從功臣贈通政大夫承政院左承旨兼經筵參官浪仙齋金公 遺墟碑), 선무원종공신 통정대부 승정원좌승지 경주김공 사적비(宣武原從功臣通政大夫承政院左承旨慶州金公事蹟碑), 죽당 최선생 사적비(竹塘崔先生事蹟碑) 등이 있다.

[효자열부비(孝子烈婦碑)]

효자열부비는 조선 시대에 타인에게 귀감이 될 만한 인물의 행적을 기리기 위하여 효자·열녀·효부 등에게 각종 표창비를 내렸으며, 이를 기념하기 위해서 문중이나 후손 및 지역에서 그 행적을 기록하여 세운 비석이다. 김해 김공 경좌 처 열녀 광산 김씨지비(金海金公慶佐妻烈女光山金氏之碑)하동군 고전면 대덕리 대덕마을에 있다. 광산 김씨는 18세에 시집가서 시부모와 남편을 정성으로 모셨다. 남편이 죽자 53세 나이로 남편을 따라 죽었던 열행을 기려서 1875년에 세웠다.

이외에 하동 지역의 효자비와 열부비로는 구정 함창김공 효행사적비(龜亭咸昌金公孝行事蹟碑), 경주 최씨 양세 삼효비(慶州崔氏兩世三孝碑), 강효부 성씨 사행비(姜孝婦成氏事行碑), 귤은 김해김공 포효비(橘隱金海金公褒孝碑), 김성행 효자비(金聖行孝子碑), 김재주 효행비(金載周孝行碑) 김창휘 효자비(金昌輝孝子碑), 열녀 진양 정씨지비(烈女晉陽鄭氏之碑), 열부 유인 성산 이씨지비(烈婦孺人星山李氏之碑)[하동군 양보면 통정리 대내마을], 열부 유인 성산 이씨지비(烈婦孺人星山李氏之碑)[하동군 양보면 지례리 예성마을], 용궁 김병희 처 열부 전주 전씨 열행비(龍宮金炳希妻烈婦全州全氏烈行碑), 유인 문씨 열행비(儒人文氏烈行碑), 유인 진양 유씨 효열사적비(儒人晉陽柳氏孝烈事蹟碑), 효열 유인 안동 권씨지비(孝烈孺人安東權氏之碑), 효열부 유인 밀양 손씨 기적비(孝烈婦儒人密陽孫氏紀蹟碑), 효자 달성서공 석쇄지비(孝子達城徐公錫瑣之碑), 효열부 은진 송씨지비(孝烈婦恩津宋氏之碑), 효자 모헌 진양정 공원철 행적비(孝子慕軒晉陽鄭公源喆行蹟碑), 효자 사인 함창 김공 광언지비(孝子士人咸昌金公光彦之碑), 효자 신암왕공 실적비(孝子信庵王公實蹟碑), 효자 전주이공경인 실행비(孝子全州李公慶仁實行碑), 달하처사 달성서공용순 효자비(達下處士達城徐公龍巡孝子碑), 유인 진양 정씨 효자비(儒人晉陽鄭氏孝子碑), 유인 진양 하씨 열행사적비(孺人晉陽河氏烈行事蹟碑), 정부 유인 남원 양씨 유적비(貞婦儒人南原梁氏遺蹟碑), 통정공 숙부인 김해 김씨 기적비(通政公淑夫人金海金氏紀勣碑), 하동 정씨 사열부 기적비(河東鄭氏四烈婦紀蹟碑) 등이 있다.

[기타]

그 외에 이삼현 영세불망비(李參鉉永世不忘碑), 조부두 선정비(趙伕枓善政碑), 윤보국 기적비(尹輔國紀蹟碑) 등과 같이 고을 수령의 선정을 기념하기 위하여 세웠던 선정비도 있다. 또한 하동군 고전면 고하리삼일 독립운동 의거 기념비·북천면 직전리삼일 독립운동 기념비 등의 기념탑과 하동군 옥종면 북방리동학 운동 위령탑·금남면 대송리 금정사금정사 영령탑 등의 위령탑도 있다.

[의의]

하동 지역의 석비 가운데 쌍계사 진감선사대공탑비는 인물사·지역사·전체사·미술사 연구에서 매우 귀중한 자료일 뿐만 아니라 통일 신라 시대의 부족한 문헌 자료를 보완하는 1차 사료로서 매우 높은 가치를 지니고 있으며, 또한 서예학·민속학·금석학 등 여러 분야에서도 자료적 가치가 매우 높다. 이외의 하동 지역 석비는 건립 연대가 그렇게 오래되지 않고 내용도 문헌에 비교적 상세하게 남아 있으므로 자료적 가치가 낮다. 그러나 그것이 가진 지역학과 민속학의 자료로서의 가치를 결코 소홀히 할 수는 없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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