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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3401772
한자 曺植
영어음역 Jo sik
이칭/별칭 건중(楗仲),남명(南冥),산해(山海),방장산인(方丈山人),문정(文貞)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인·학자
지역 경상남도 하동군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전병철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501년연표보기
활동 시기/일시 1555년연표보기
활동 시기/일시 1558년연표보기
활동 시기/일시 1566년연표보기
활동 시기/일시 1568년연표보기
몰년 시기/일시 1572년연표보기
추모 시기/일시 1615년연표보기
추모 시기/일시 2010년 12월 20일연표보기
출생지 경상남도 합천군 삼가면 외토리
부임|활동지 경상남도 산청군 시천면 사리
묘소|단소 경상남도 산청군 시천면 사리
기념물 하동군 옥종면 양구리 지도보기
성격 유학자
성별
본관 창녕(昌寧)

[정의]

조선 전기 하동의 유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끼친 학자.

[가계]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건중(楗仲), 호는 남명(南冥)·산해(山海)·방장산인(方丈山人)이다. 증조할아버지는 생원 조안습(曺安習)이고, 할아버지는 봉사(奉事) 조영(曺永)[1428~1511]이며, 아버지는 승문원판교(承文院判校) 조언형(曺彦亨)[1469~1526]이다. 증조할머니는 강성 문씨(江城文氏)로 삼우당(三憂堂) 문익점(文益漸)[1329~1398]의 종손녀(從孫女)이고, 어머니는 인천 이씨(仁川李氏)로 충순위(忠順衛) 이국(李菊)[1451~1519]의 딸이다.

부인은 남평 조씨(南平曺氏)로 충순위 조수(曺琇)의 딸이다. 슬하에 1남 1녀를 두었는데, 아들 조차산(曺次山)은 9세에 요절하였다. 딸은 만호(萬戶) 김행(金行)에게 시집가 두 딸을 두었는데, 각각 김우옹(金宇顒)곽재우(郭再祐)에게 시집갔다.

소실은 은진 송씨(恩津宋氏)로 첨정(僉正) 송인(宋璘)의 딸이다. 슬하에 3남 1녀를 두었다. 아들은 의령현감(宜寧縣監) 조차석(曺次石)[1552~1616], 칠원현감(漆原縣監) 조차마(曺次磨)[1557~1639], 만호(萬戶) 조차정(曺次矴)[1560~1645]이다. 딸은 군수 조신도(趙信道)에게 시집갔다.

[활동 사항]

조식(曺植)[1501~1572]은 1501년(연산군 7) 음력 6월 26일 경상도 삼가현(三嘉縣) 토동(兎洞) 외가에서 태어났다. 할머니가 하동군 옥종면 삼장골 출신의 지족당(知足堂) 조지서(趙之瑞)[1454~1504]의 누님이었기 때문에 어릴 적부터 할머니의 친정인 하동과 인연이 깊었다.

아버지가 벼슬길에 나가면서 5~6세경 서울로 올라가 26세 때까지 살았다. 26세 되던 해 3월에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고향 선영에 장사 지낸 뒤 삼년상을 치렀다. 그러고는 의령 자굴산[闍堀山] 산사에서 독서하다가, 30세 때 처가가 있는 김해로 옮겨 성리학에 침잠하였다. 이때 신계성(申季誠)·김대유(金大有)·이희안(李希顔) 등과 교유하며 학문을 토론하였다.

31세 때 과거 시험을 준비하기 위해 『성리대전(性理大全)』을 읽다가, 원나라 학자 허형(許衡)의 말에 크게 깨달아 학문의 대전환을 이루었다. 45세 때 모친상을 당하여 삼년상을 치른 뒤, 삼가 토동에 계부당(鷄伏堂)과 뇌룡정(雷龍亭)을 짓고 제자들을 가르쳤다. 이 시기에 조식은 어지러운 세상에 나아가지 않고 도덕을 더욱 함양하여 세도(世道)를 부지하려고 하였다.

55세 때인 1555년(명종 10) 단성현감(丹城縣監)에 제수되었는데, 상소문만 올리고 나아가지 않았다. 61세 때 천왕봉이 바라보이는 덕산(德山)으로 이사하여 산천재(山天齋)를 짓고 더욱 깊숙이 은거하였다. 66세 때인 1566년(명종 21) 초야의 어진 이를 부르는 소명(召命)이 있어, 상경하여 왕을 배알하였다. 이때 상서원판관에 임명되었으나 역시 사양하고 돌아왔다. 1568년 선조가 즉위하여 다시 불렀으나 사양하였으며, 이때 올린 상소문이 유명한 「무진봉사(戊辰封事)」이다.

1558년(명종 13) 4월 10일부터 26일까지 친구 및 문인들과 함께 지리산을 유람하였는데, 그때의 일을 「유두류록(遊頭流錄)」으로 남겼다. 일정을 보면, 4월 11일 합천 삼가 계부당에서 출발하여 진주 금산에 있던 이공량(李公亮)의 집으로 가서 머물렀다. 4월 14일 사천 이정(李楨)의 집으로 갔다가 다음 날 장암(場巖)의 쾌재정(快哉亭), 사천만(泗川灣), 곤양(昆陽) 앞바다를 거쳐 하동포구에 닿았다. 4월 16일 하동에서 악양, 삽암, 도탄(陶灘), 정여창(鄭汝昌)의 옛 집터, 화개, 쌍계석문(雙磎石門), 쌍계사를 유람하고 쌍계사에서 며칠 머물렀다.

4월 19일 쌍계사에서 불일암(佛日庵)과 지장암(地藏庵)을 다녀오고 이튿날 신응사(神凝寺)로 갔다. 다시 신응사에서 며칠 머문 뒤 4월 23일 화개와 악양현 현창(縣倉)을 보고 악양현, 삼가식현, 횡포역, 두리현, 정수역을 거쳐 진주 칠송정(七松亭), 다회탄(多會灘)을 지나 합천 뇌룡사(雷龍舍)로 갔다. 「유두류록」은 하동의 경승이 잘 나타나 있을 뿐 아니라 이후 지리산을 유람하는 사람이 반드시 읽어야 하는 작품으로 인식될 만큼 당대의 문인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학문과 저술]

조식은 젊은 시절 부지런히 독서하여 경전·역사서·제자백가 등을 두루 섭렵하였을 뿐만 아니라, 천문·지리·의학 등에도 뜻을 두고 이치를 궁구하였다. 또한 기이하고 고아한 문장을 짓는 데 힘을 썼는데, 특히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과 당나라 때 고문 운동을 일으킨 유종원(柳宗元)의 글을 탐독하였다.

평생 벼슬하지 않고 초야에 깊숙이 묻혀 지냈지만, 항상 나라를 걱정하고 백성을 염려하는 마음으로 현실에 관심을 두며 세상을 잘 다스릴 방도를 생각하였다. 이는 55세 때 올린 상소문에도 잘 나타나 있다. 조식은 당시 나라 사정을 ‘벌레가 백 년 동안 갉아먹어 곧 쓰러질 지경에 이른 나무’에 비유하며, 국정의 폐단을 조목조목 열거하였다. 또한 명종을 ‘고아’로, 문정 왕후를 ‘과부’로 표현하여 조정에 큰 파문이 일게 하였다.

노년에 산천재를 짓고 은거하였는데, ‘산천(山天)’이란 『주역(周易)』 대축괘(大畜卦)의 뜻을 취한 것으로, ‘강건하고 독실하게 수양하여 날마다 그 덕을 새롭게 한다’는 의미를 갖는다. 만년에 자신을 수양하는 척도로 경(敬)과 의(義)를 내세웠다. 산천재 양쪽 벽에 이 두 자를 크게 써 붙여 놓았으며, 칼에다 ‘안을 밝히는 것이 경(敬)’이고 ‘밖을 결단하는 것이 의(義)’라고 새겨 학문의 양대 지표로 삼았다.

또한 당시 학문이 성리학의 형이상학적 명제를 탐구하는 쪽으로 경도된 것을 개탄하며, 실천적 수양을 강조하였다. 1568년(선조 1) 올린 「무진봉사」에 의하면 명선(明善)과 성신(誠身)을 국가를 다스리는 대체(大體)로 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저서로 『남명집(南冥集)』과 『학기유편(學記類編)』 등이 있다.

조식의 학문은 ‘남명 이래 제 일인자’로 불린 하홍도를 통하여 하동 지역에 큰 영향을 주었다. 하홍도송정(松亭) 하수일(河受一)[1553~1612]에게 수학했는데, 하수일조식의 제자인 각재(覺齋) 하항(河沆)[1538~1590]의 제자이다. 하홍도조식으로부터 하항하수일에게 내려온 남명학의 핵심을 전수받아 후대에 이어지도록 하였다. 하홍도의 학문은 설창(雪牕) 하철(河澈)[1635~1704]과 삼함재(三緘齋) 김명겸(金命兼)[1635~1689]을 거쳐 주담(珠潭) 김성운(金聖運)[1673~1730]과 지명당(知命堂) 하세응(河世應)[1671~1727]에게 이어졌다.

[묘소]

조식은 72세 때인 1572년(선조 5) 음력 2월 8일 지금의 경상남도 산청군 시천면에 있는 산천재에서 일생을 마감하였다. 묘소는 경상남도 산청군 시천면 사리 산천재 뒷산에 있다.

[상훈과 추모]

부음이 전해지자, 조정에서 사간원대사간(司諫院大司諫)에 추증하였다. 1615년(광해군 7) 영의정에 추증하였으며, 문정(文貞)이란 시호가 내려졌다. 2010년 12월 20일, 하동군 옥종면 양구리 양구삼거리에 조식의 자취와 업적을 기려 ‘남명 조선생 숭모비(南冥曺先生崇慕碑)’를 건립하였다. 이곳에 숭모비를 세운 까닭은 남명이 1558년 지리산을 유람할 때 하동군 옥종면 정수리 영당마을 정수역에서 하룻밤을 묵었기 때문이다. 오늘날에도 하동은 경상 우도 남명학의 핵심 지역으로 인식되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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