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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3401774
한자 孝子
영어의미역 Filial Son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종교/유교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상남도 하동군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전병철

[정의]

전통 시대 경상남도 하동 지역에서 부모를 효성으로 극진하게 섬긴 자녀.

[개설]

전통 시대에 경남 하동 지역에서 지극한 효행을 실천한 효자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 따라서 그와 같은 효자 중에서 특출한 행적이 있어 나라로부터 정려가 내려지거나 신이한 기적이 일어나 사람들에 의해 칭송되어진 사실들을 우선으로 서술하였다. 하동 지역 효자들이 행한 효행의 행적을 중심된 사건에 따라 나누어 본다면, 크게 두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하나는 부모님에게 극진한 봉양을 한결같이 행한 효행이며, 다른 하나는 부모님의 병구완 및 상례에 신이한 행적을 행한 효행이다.

[극진한 봉양을 한결같이 행한 효행]

1. 양보면

하동군 양보면의 효자로는 김세규(金世奎), 김재주(金載周), 정원명(鄭源命)을 들 수 있다. 김세규는 천성이 순수하고 효성스러웠고 타고난 자질이 똑똑하였다. 문리를 일찍 깨쳤고 부모님을 모심에 효를 다하였다. 아버지 어머니가 병이 났을 때 모시는 일을 다른 사람에게 맡기지 않고 손수 탕약을 지어올리고 속옷을 직접 빨아 깨끗이 해 드렸다. 6년 상(喪)을 치르는 동안 수질(首絰)[상복을 입을 때 머리에 두르는 둥근 테]과 요질(腰紩)[상복을 입을 때 허리에 띠는 띠]을 한 번도 풀지 않았고, 아침저녁으로 하는 성묘는 비가 오나 바람이 부나, 더워도 추워도 한 번도 빠트리지 않았다. 고을 사람들이 그의 효성에 감복하여 그가 성묘하러 가는 길을 닦아 편하게 해 주었다.

김재주는 천성이 아주 효성스러웠다. 어릴 때부터 혼정신성하는 효를 어김없이 다하였다. 7년 간 병든 아버지를 모시면서 약이란 약은 다 구해 드시게 했으며, 아버지를 대신하여 죽게 해 달라고 빌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3년을 하루같이 제물을 차리고 슬프게 통곡하였다. 예순 살 늙은 몸으로 어머니를 모시면서는 중국의 이름난 효자 왕연(王延)·노래자(老萊子) 같이 마음과 물질 모든 면에서 봉양을 극진히 했다.

정원명은 어려서부터 부모 섬기는 도리를 알아 봉양을 잘 하였다. 7년 동안 부모가 병들어 있었으나 잠시도 곁을 떠나지 않고 약을 탕제 하여 먼저 맛을 보며, 항상 입에 맞는 음식과 몸에 편한 의복을 갖추어 드렸다. 어머니 김씨가 만년에 장님이 되자 자신이 수족의 역할을 하였다. 3년 동안 묘지가 멀리 있어도 매일 성묘를 하였고 3년 후에도 매월 두 번 이상 성묘를 하였다.

2. 고전면

하동군 고전면에 살던 김수직(金守直)은 천성이 순후하고 효성스러웠다. 어려서부터 고기나 과일이 생기면 반드시 부모님께 먼저 드렸다. 어른이 되어서는 농사를 지어 맛있는 음식으로 부모를 봉양하였다. 여름에는 생선을 냉장 보관하였다가 요리해 드렸으며, 겨울에는 미음과 죽을 따뜻이 끓여 드렸다. 한번은 아버지께서 겨드랑이에 종창을 앓았는데, 의원이 종창 깊이를 재겠다고 막대기를 넣었다가 중간에 부러졌다. 김수직이 십여 일을 입으로 종기를 빨아 막대기를 빼내었고 종기도 나았다. 어머니가 10년을 학질로 병석에 누워 있을 때는 손가락을 잘라 그 피를 마시게 하여 살려냈다. 부모상에 아침저녁으로 성묘하기를 춥거나 덥거나 바람이 부나 비가 오나 하루도 그만두지 않았다.

3. 진교면

하동군 진교면의 효자로는 김현주(金顯周)박달숙(朴達淑)이 있다. 김현주는 천성이 순수하고 두터웠다. 어려서부터 부모님께 효도하고 근신하며 착하였다. 어른이 되어서는 부모님의 명이 있어야만 행동하였다. 숙부에게 양자로 가서는 친자식처럼 잠자리를 살펴 드리고 봉양하는 데에 정성을 다하였다. 어머니가 몸져누웠을 때에는 밤에도 곁을 떠나지 않으면서 손발이 되어 드렸는데, 이와 같이 하기를 3년 동안 하였다. 홀로 남은 아버지의 외로움을 달래드리려고 아버지 방 옆에 별도로 방을 만들어 놓고 모시면서 기쁘게 해드렸다. 아버지가 부스럼이 나서 잘 낫지 않자 예순이 넘은 몸으로 아버지 병을 대신하게 해 달라고 빌었다. 아버지께 드릴 약을 일일이 맛보며 정성을 다하여 모셨다.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슬픔과 예를 극진히 하였으며, 그 뒤에도 고기와 술을 먹지 않았다.

박달숙은 나이 겨우 3살에 아버지를 잃고 12살에 어머니가 앞을 볼 수 없게 되었다. 의지할 데 없는 외로운 몸으로 어머니를 모셨다. 어머니가 대소변을 보러 갈 때는 반드시 자신이 몸소 부축을 해 드리면서 20년을 한결같이 모셨다.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너무나 슬퍼하여 아침마다 성묘하였는데 비바람 추위 더위에도 하루도 빠트리지 않았다. 아버지 제삿날이 되면 아버지 얼굴을 모르는 것을 천추의 한으로 여기고 제사를 극진히 모셨다.

4. 악양면

하동군 악양면의 효자로는 노수(盧禭)이갑순(李甲淳)을 들 수 있다. 노수는 나이 일흔으로 백세 부모를 모셨는데 자잘한 음식도 몸소 받들어 드렸으며, 부모님이 반걸음을 걸을 때도 반드시 부축해 드렸다. 3년 상(喪)에 정성을 다하였는데, 상중에 그의 자손이 고기반찬을 해 드리자 “내가 상중에 있을 날은 얼마 되지 않고, 고기 먹을 날은 지금 아니라도 얼마든지 많다”고 하면서 꾸짖었다.

이갑순은 천성이 강직했으며 효성을 타고났다. 열한 살에 아버지를 잃고 어머니를 모시고 살았는데, 외출해서 특별히 맛난 것이 있으면 반드시 챙겨 와서 어머니께 드렸다. 스승을 찾아 공부하러 나가 있을 때도 아무리 비바람이 치고 어두운 밤이라도 혼정신성(昏定晨省)[아침저녁으로 어버이를 살펴 모시는 일]을 조금도 빼먹지 않았다. 한 번은 이웃집에 불이 나서 이갑순의 집에 옮겨 붙었는데, 어머니가 불속에 들어가서 옷가지와 양식을 끌어내려다 질식하여 사경을 헤매고 있었다. 마침 이갑순이 외출하여 들어오는 길에 이를 보고 어머니를 구해냈다.

5. 횡천면

하동군 횡천면에 살던 이승환(李升煥)은 타고난 성품이 순후하고 단정 장엄하며 효성이 지극하였다. 부모의 명을 받들어 순종하며 외출하고 돌아와서는 반드시 아뢰었다. 아침저녁으로 문안드리고 잠자리 살피는 예를 성실히 행하였다. 성장하여서도 힘을 다하여 어버이를 섬겨 몸과 마음을 편안하게 해 드렸다.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무덤가에 여막을 짓고 소리 내어 슬피 우니 무릎 꿇었던 자리에 풀이 마르고 구덩이가 생겼다. 동네 사람이 동네 어귀에 ‘효자촌’이라고 간판을 세웠는데, 일본 병사도 이를 보고는 한 번도 침범하지 못하였다. 돌아가시기까지 어버이 제사에는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하였고 40리 성묘 길을 한 번도 거르지 않았다.

6. 출신지 미상

이계준(李啓俊)은 천성이 아주 효성스러웠다. 한번은 아버지가 어쩌다 술을 마셔 몸을 가누지 못하고 들판에 쓰러져 잠이 들었다. 이 때 이계준은 집에서 잠을 자고 있었는데 꿈에 한 노인이 불러 깨우기에 급히 문밖으로 나가보니, 아버지가 쓰러져 있는 들판에 불이 나서 아버지를 덮칠 기세였다. 이계준은 연기 속에 뛰어들어 아버지를 업고 나왔다. 또 아버지가 병이 났을 때 잉어를 잡아 지져드렸더니 병이 나았으며, 아버지가 위독할 때 손가락을 깨물어 흐르는 피를 입에 넣어드렸더니 며칠을 더 살았다.

이규술(李奎述)은 천성이 매우 효성스러웠다. 어버이를 섬김에 뜻을 잘 받들고 물질적 봉양도 잘 하였다. 어버이가 여러 해 병중에 있을 때 똥을 맛보며 병세를 알아봤다. 병세가 위독해져서는 하늘에 대고 자신이 대신 아프게 해달라고 빌었는데 이 때문인지 병세가 호전되어 몇 해를 더 사셨다. 또 어느 해 큰 흉년이 들었을 때 작은 아버지를 모시면서 맛난 것을 드리고 잠자리를 살피는 효를 조금도 빠트림이 없어 부모 모시는 것과 다를 바 없이 하였다.

이기환(李基煥)은 천성이 아주 효성스러웠다. 어버이를 섬길 때에 뜻을 잘 받들고, 물질적 봉양을 잘 하였다. 상을 당했을 때 슬픔과 예를 다하고 있었는데, 그 때 마침 동쪽에서 난동이 있어 동네 사람이 모두 피란을 가 버려 온 동네가 텅 비었다. 이기환이 혼자 남아 빈소를 지키고 있었는데, 어떤 사람이 이 변란을 피하지 않으면 큰 재앙이 따를 것이라며 피란을 권하였다. 이기환이 듣고는 정색을 하여 말하였다. “돌아가신 이 섬기기를 산 사람 같이 해야 한다. 지금 어른이 자리에 계신데 내가 어디로 달아난단 말인가” 하고는 빈소를 끝까지 지켰는데 우려할 만한 일은 끝내 없었다. 매달 초하루와 보름에 바람이 부나 비가 오나 추우나 더우나 한 번도 성묘를 빠트리지 않았는데 여든 살이 되도록 그렇게 하였다.

정태구(鄭泰龜)는 어릴 때부터 어버이에 대한 효성이 독실하였다. 밖에 나갔다가 색다른 음식이 있으면 싸 가지고 돌아와서 어버이께 드렸으며, 모든 일을 어버이께 여쭈고 행하였다. 병수발을 할 때에는 관대(冠帶)를 하고 곁을 떠나지 않았으며, 탕제(湯劑)는 반드시 손수 달였다. 1740년 아버지의 상을 당하자, 매일같이 산소에 가서 곡을 하였으며 추우나 더우나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혹시라도 이를 빠뜨린 적이 없었다. 꿇어앉아 절하던 자리가 깊게 홈이 파여 그 흔적이 남아 있고, 또 묘소 앞에는 마치 띠처럼 길이 생겼는데, 사람들은 이를 가리켜 ‘정 효자(鄭孝子)의 길’이라고 불렀다 한다. 1743년에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아버지의 상과 똑같이 예를 다하였다.

[신이한 행적을 행한 효행]

1. 고전면

하동군 고전면의 효자로는 공언식(孔彦植), 염정일(廉廷一), 염종환(廉宗煥), 염태섭(廉台燮)이 있다. 공언식은 어려서부터 타고난 성품이 매우 효성스러웠다. 13살 때 어머니 남평 문씨가 복통(腹痛)으로 몸져누워 8년을 병석에서 지내게 된다. 공언식은 온 힘을 다해 병구완을 하고 자신이 어머니 대신 아프게 해 달라고 기도한다. 그러는 가운데 한 번은 숨이 넘어 갈 상황이 닥치는데, 공언식은 손가락을 잘라 피를 내어 어머니께 마시게 한다. 이렇게 해서인지 어머니는 소생하여 16년을 더 살게 된다. 상례(喪禮)를 법도에 따라 정성을 다하였으며, 3년 시묘를 피눈물로 하였다.

염정일은 아버지가 아파서 의원을 찾아 가는 길에 나루에 이르렀는데, 어떤 여자가 말하기를 “남쪽에서 의원을 구하면 효험이 있을 것이다” 하여 여자가 말한 대로 의원을 찾아 치료를 했더니 효험이 있었다. 또 아버지가 한겨울에 죽순을 먹고 싶다고 하여, 대밭에서 사흘 동안 울면서 기도하여 죽순을 구해 아버지께 드렸다. 부모 시묘 살이 6년 동안 호랑이가 늘 함께 하면서 그를 지켜주었다. 3년 뒤 어느 날 꿈을 꾸었는데, 사천(泗川) 와룡산 호랑이가 나타나 맹씨가 설치한 함정에 빠졌다고 하였다. 깨어나서 그곳에 가 보았더니 시묘 살이 6년 동안 함께 했던 바로 그 호랑이였는데, 염정일이 호랑이를 구해서 돌아왔다.

염종환은 아버지가 병석에 있을 때 입으로 고름을 빨아내어 등창을 낫게 하였으며, 똥의 맛을 보면서 병세를 살폈다. 어느 해 여름에 어머니가 병이 났는데, 생김[海苔] 국을 먹고 싶어 하였다. 구할 길이 없어 사흘 동안 냇가에 엎드려 하늘에 빌었는데, 꿈에 한 노인이 생김이 있는 곳을 가르쳐 주어 생김을 구해 어머니에게 국을 해드렸다. 부모 상(喪) 6년 동안 시묘 살이 할 때 언제나 호랑이가 곁에서 도왔다.

염태섭은 아버지가 치질(痔疾)이 있었는데, 약으로 산삼이 제일 좋다는 말을 듣고 산삼을 찾아 나서게 된다. 이 때 노승(老僧)이 나타나 두 번 절한 뒤, 산삼 두 뿌리를 주고는 홀연히 사라졌다. 염태섭이 급히 이 산삼을 달여 아버지께 드렸는데 효험이 있었다. 염정일, 염종환, 염태섭의 효행을 기리는 효자려가 하동군 고전면 신월리에 있다.

2. 진교면

하동군 진교면에 살던 백기수(白麒洙)는 아버지의 병이 위독하여 의원에게 달려가는데 홍수가 길을 막아 갈 수가 없었다. 이때 갑자기 바위가 굴러 와서 다리가 되어 건너갈 수 있었다. 또 어머니의 병이 낫지 않자 매일 새벽 우물물로 정화수를 올리고 하늘에 호소하였더니, 갑자기 솔개가 날아와서 오골계를 떨어뜨려 놓고 갔다. 백기수가 이를 가져와서 어머니께 약으로 해 드렸더니 어머니의 병이 점차 나아졌다.

3. 양보면

하동군 양보면에 살던 여수엽(余守燁)은 평소 부모님께 맛있는 음식을 한 번도 빠트리지 않고 모셨다. 아버지가 4년간 병석에 계셨는데 의원이 개 쓸개를 쓰면 낫게 할 수 있다고 해서, 개를 잡아 쓸개를 갖고 오는데 날아가는 솔개가 낚아채어 가는 일이 벌어졌다. 하늘에 대고 울부짖으니 쓸개가 땅에 떨어졌다. 아버지께 약으로 드시게 했더니 효험이 있었다. 또 나이 많은 어머니가 지병이 있었는데, 낫게 해 달라고 하늘에 기도하고 밤으로 울부짖으니 꿈에 한 노인이 나타나서 산삼이 있는 곳을 알려주었다. 산삼을 캐서 어머니께 잡숫게 했더니 어머니가 3년을 더 사셨다.

4. 적량면

하동군 적량면에 살던 이진복(李震復)은 집이 가난했지만 어버이를 섬길 때는 맛난 음식을 반드시 갖추어 올렸다. 어머니가 학질이 있어 이진복이 의원을 찾아 나갔다가 밤이 되어 돌아오는 길을 어떤 호랑이가 따르면서 지켜주었다. 20리 거리의 어버이 묘소를 하루도 빠지지 않고 성묘를 했는데, 하루는 개울물이 불어서 건널 수가 없게 되었다. 이에 개울가에서 하늘을 보고 울부짖으며 통곡하니 갑자기 물 흐름이 끊겨 건널 수 있었다. 기일이 되면 살아 계실 때와 같이 정성을 다하고 철 따라 나는 새로운 음식이나 반찬을 대하면 어버이 생각에 차마 먹지 못하며 어버이 일만 떠오르면 몰래 눈물을 흘렸다.

5. 출신지 미상

정창시(鄭昌時)는 부모를 섬김에 효의 도리를 다하였는데, 부모가 병이 생겨 위독할 적에 손가락을 베어 피를 드시게 하여 두 번이나 소생시켰다. 부모의 봉양을 위해 맛난 것을 구하고자 하였으나 겨울이라 구할 수 없어 안타까워 하니 산 꿩이 날아들었고, 시묘 6년 동안 호랑이가 나타나 지켜주었다고 한다.

추성원(秋成元)은 13세 때 어머니 창원 황씨가 병이 나자 지리산, 금오산 등에서 약초를 구해 드렸으나 소용이 없었다. 이를 지켜보던 이웃 노인이 효성에 감동하여 속설에서 들은 말로 인육을 먹으면 병이 나을 것이라고 하니, 즉시 자신의 허벅지 살을 도려내어 삶아 드리니 병이 완쾌되었다. 그 뒤 아버지가 전염병에 걸려 갑자기 기절을 하니, 추성원이 급하게 손가락을 베어 피를 입안에 넣어 소생시켰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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