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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3401798
한자 李舜臣白衣從軍-
영어의미역 The Hadong Route of Admiral Lee Sunsin Serving in War as an Enlisted Man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경상남도 하동군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박용국

[개설]

이순신(李舜臣)[1545~1598]의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여해(汝諧)이다. 과거에 급제한 뒤 여러 번 승진하여 1591년(선조 24) 전라좌도수군절도사가 되었다.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옥포, 사천포, 당포, 당항포, 한산도, 안골포, 부산포 등의 해전에서 연전연승을 거두고, 1593년(선조 26)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었다. 그러나 1597년(선조 30) 조정에서는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바다를 건너올 것’이라는 일본이 흘린 거짓 정보에 속아 그에게 가토 기요마사를 생포하라 명하였다. 이순신은 일본의 계략임을 알고 이에 응하지 않았다가 파직되고 투옥되었다.

이후 우의정 등의 도움으로 간신히 목숨을 구한 이순신은 도원수 권율(權慄) 밑에서 백의종군하라는 선조의 명을 받았다. 그리하여 이순신은 1597년 4월 1일 옥에서 풀려나고, 3일 한양을 떠나 6월 4일 경상남도 합천의 초계 도원수부 초입까지 걸어 내려갔는데, 당시 하동을 거쳐 초계로 내려간 일정이 『난중일기(亂中日記)』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원균(元均)이 일본군에 참패하고 전사하자 이순신은 다시 수군통제사로 임명되었다. 그는 곧 명량대첩으로 해상권을 회복했으나 노량해전에서 유탄에 맞아 전사하였다.

[영웅을 알아본 시대를 살다]

임진왜란은 1592년(선조 25) 4월 14일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소 요시토시[宗義智] 등이 거느린 1만 8700명의 왜군 제1진이 부산포에 상륙하여 부산진을 공격함으로써 발발하였다. 사실 당시 조선이 왜군의 침략에 대해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이를테면 조선은 왜군이 침입할 연해 지방의 요충지 열읍(列邑)에 방어 시설을 점검하고 갖추었다. 또한 이를 감당할 수 있는 인물을 찾아 과감히 불차탁용(不次擢用)[관계(官階)의 차례(次例)를 밟지 않고, 차서(次序)를 뛰어 넘어 벼슬에 등용함]하였다. 비변사를 중심으로 외적을 방어하기 위해 무신을 적절하게 배치하려는 노력을 했던 것이다.

이순신은 1589년(선조 22) 12월 종6품 정읍현감을 제수 받았고, 1591년(선조 24) 2월에는 진도군수를 제수 받았다. 그리고 진도에 미처 부임도 하기 전인 같은 달 13일 전라좌도수군절도사를 제수 받았다. 정읍에서 단박에 좌수영에 부임할 정도로 1589년 12월 이후부터 1591년 2월 13일까지 그의 관직 제수는 불차탁용에 어울리는 극적인 요소를 보여 준다. 매우 파격적인 불차탁용이어서 간원(諫院)의 반대도 있을 정도였다. 따라서 조선이 왜군의 침략을 전혀 예측하지 못한 것이라기보다 그러한 대규모 기습 침략에 대비하지 못했던 것이다. 조선은 왜적의 침략을 받은 지 불과 20일도 지나지 않아 도성(都城)을 점령당한다.

이순신의 승진을 보면 당시의 상황이 상당히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그의 불차탁용은 대외적 위기 상황과 관련이 크다고 하겠다. 그의 불차탁용은 오로지 이순신의 능력이나 이산해(李山海)정언신(鄭彦信)의 추천, 유성룡(柳成龍)의 천거만이 아니라 선조가 비변사 낭청의 동의를 얻어서 이루어졌다. 특정 동인의 지지를 받아 불차탁용했다고 볼 수 없는데, 아마도 그랬다면 불차탁용에서 2등에 그칠 리가 없었다. 따라서 비변사를 중심으로 하여 적당한 능력을 갖춘 무신을 불차탁용하여 적재적소, 특히 연해안의 적로(賊路)에 배치하려는 노력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직접적으로 임진왜란을 대비했다고 볼 수는 없으나 예상을 전혀 하지 않았다고 볼 수도 없다. 결국 이순신의 관력에서 불차탁용과 왜침에 대한 수비(修備)는 그의 능력만이 아니라 당시 상황에서 초래된 것임을 알 수 있겠다.

[옥문을 나서다]

전쟁이 한창이던 1597년(선조 30) 1월 이순신은 조정을 가벼이 여기고 임금을 속인 죄로 나국(拿鞠)[죄인을 잡아다 국청에서 신문함. 또는 그런 일]을 받아 3월 4일 옥에 갇히고 문초를 받았다. 이순신은 판부사 정탁(鄭琢)[1526~1605]의 구원으로 겨우 목숨을 구했으나 선조로부터 초계에 있는 도원수부에 백의종군할 것을 명받았다. 당시 도원수는 권율(權慄)[1537~1599]이었다.

4월 1일 옥문을 나선 이순신은 남문[숭례문] 밖 윤간의 종 집에서 기다리던 조카와 아들을 만나 오랜만에 회포를 풀었다. 윤자신(尹自新)이순신(李純信)[1554~1611]이 직접 술을 가지고 와서 위로하고, 영의정 유성룡이 종을, 판부사 정탁(鄭琢)과 판서 심희수(沈禧壽), 우의정 김명원(金命元), 참판 이정형(李廷馨), 대사헌 노직(盧稷), 동지 최원(崔遠)곽영(郭嶸)이 사람을 보내어 문안했다. 이날 이순신은 더해지는 슬픈 마음을 이길 길이 없어, 정으로 권하고 위로하는 술을 차마 사양하지 못하여 억지로 마셔 몹시 취했다고 일기에서 적고 있다.

4월 2일 종일 비가 내렸는데, 이순신은 어두울 무렵 성으로 들어가 영의정과 밤이 깊도록 이야기하다가 헤어져 나왔다. 그만큼 남의 눈이 두려웠던 것이다. 그리고 다음날 초계에 있는 도원수부로 가기 위해 일찍 길을 나섰고, 수원부에 도착하여 쉬다가 경기체찰사의 수하에서 심부름하는 이름을 알 수 없는 병졸의 집에서 하루 밤을 보냈다.

[죽음보다 고통스러운 길을 가다]

4월 13일 이순신은 그리던 어머니를 만날 꿈에 부풀어 있었으나 바닷가 포구에 닿기도 전에 어머니 부고를 듣는다. 그는 『난중일기』에서 “하늘이 캄캄했다.”라고 적고 있다. 어머니를 여의고 장례도 치르지 못한 채 초계 도원수부로 향해 길을 나서야 하는 심정이야 오죽했겠는가. 그는 차라리 죽어서 어머니와 두 형을 뵙고 싶었을 것이다. 그 일기를 보자.

4월 16일[양력 5월 31일, 병자] 이순신은 “비가 내리는 가운데 배를 끌어 중방포 앞으로 대고, 영구를 상여에 올려 싣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마을을 바라보니 찢어지는 듯 아픈 마음을 어쩔 수 없었다. 비는 퍼붓고 맥이 다 빠진데다가 남쪽으로 갈 날은 다가오니, 호곡하며 다만 어서 죽었으면 할 따름이다.”라고 하였다.

4월 17일 서리 이수영(李秀榮)이 공주에서 와서 가자고 다그쳤지만, 차마 어머니의 영전을 떠나지 못하다가 19일 일찍 길을 떠나며, 그는 어머니 영전에 하직 인사를 하면서 “천지에 나 같은 사정이 어디 또 있으랴! 일찍 죽느니만 못하다.” 라고 울부짖었다.

당시 이순신의 원통한 심정은 임진왜란 때 늘 옆에서 지켜본 조카 이분(李芬)이 지은 ‘행록(行錄)’에 잘 나타나 있다. 이순신은 “나라에 충성을 다하려다가 이미 죄가 여기에 이르렀고, 어버이에게 효도를 하고자 하였으나 어버이 또한 돌아가셨구나.”라고 대성통곡하면서 길을 나섰다고 한다.

어머니 장례도 못 치르고 떠났으니 꿈자리가 편할 리 없었다. 5월 6일 이순신의 꿈에 나타난 두 형이 서로 붙들고 울면서 “장사를 지내기 전에 천 리 밖으로 떠나와 군무에 종사하고 있으니, 대체 모든 일을 누가 주장해서 한단 말이냐. 통곡한들 어찌하리!”라고 하였다고 적고 있다. 그는 이날 일기에서 “아침저녁으로 그립고 설운 마음에 눈물이 엉기어 피가 되건마는 아득한 저 하늘은 어째서 내 사정을 살펴 주지 못하는고! 왜 어서 죽지 않는지.”라고 할 정도로 삶에 미련이 없었다.

[백의종군로 하동 구간]

5월 26일 비가 퍼 붓듯이 내리는 날, 이순신은 하동 경내에 들어섰다. 온몸과 행장이 비에 흠뻑 젖은 채 지금의 악양면 정서리에 도착했으나 잘 만한 곳이 없었다. 이순신이 김덕린이 빌린 집[이정란의 집이라 함]에 억지로 밀고 들어가 잠을 청했다. 이정란의 집이 어디인지 현재는 알 수 없으나 집 앞이 무딤이들[『토지』의 배경인 악양들]이었다 한다. 다음날 날이 개자 이순신은 아침에 젖은 옷을 바람에 걸어 말린 후 저녁나절에야 길을 떠났고, 두치[현 하동군 하동읍 두곡리]의 최춘룡(崔春龍) 집에 이르러 하루 밤을 보냈다. 최춘룡의 집 역시 현재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다.

5월 28일 저녁나절에 길을 떠나 하동 읍내[현 고전면 고하리]에 도착하자, 하동현감 신진(申蓁)이 기뻐하며 성 안 별채로 맞아들여 매우 간곡한 정을 베풀었다. 이틀 전에 몹시 고생했던지라 몸에 탈이 났던 이순신은 여기서 하루를 더 머무르고, 6월 1일 비가 내리는데도 아침 일찍 길을 떠나 정수역[현 하동군 옥종면 정수리 영당마을] 시냇가에 이르러 말을 쉬었다.

저녁 무렵 이순신은 진주 경내 사월리와 시내를 사이에 두고 마주보는 단성현 경내 사월리 박호원(朴好元)의 농노(農奴) 집에서 투숙했는데, 주인이 기꺼이 접대하였으나 잠잘 방이 좋지 못하여 겨우겨우 밤을 지내고 아침 일찍 길을 떠나 단계에서 아침을 먹었다. 이순신은 삼가를 거쳐 6월 4일 도원수부의 초입에 있는 마을에 도착하여 8월 3일 진주 수곡에서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제수될 때까지 백의종군을 하게 된다.

[다시 삼도수군통제사가 되다]

그 해 7월 18일, 초계 도원수부에서 백의종군하던 이순신은 이덕필(李德弼)과 변홍달(卞弘達)로부터 “16일 새벽에 수군이 몰래 기습 공격을 받아 통제사 원균, 전라우수사 이억기(李億祺), 충청수사 최호 및 여러 장수와 많은 사람들이 해를 입었고, 수군이 대패했다는 소식을 듣고 통곡함을 참지 못했다.”라고 『난중일기』에서 적고 있다.

이순신과 늘 함께했던 조카 이분(李芬)이 쓴 ‘행록(行錄)’에서는 권율이순신을 보내어 진주에 달려가서 흩어진 군사를 모으도록 했다고 나온다. 이와 달리 『난중일기』 7월 18일의 기록에서는 “원수[권율]가 와서 ‘일이 이 지경으로 된 이상 어쩔 수 없다’라고 말하고, 오전 열시가 되어도 마음을 정하지 못했다. ‘내가 직접 연해안 지방으로 가서 보고 듣고 난 뒤에 이를 결정하는 것이 어떻겠는가.’라고 말하니, 원수가 기뻐하여 마지않았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전자의 공식적인 기록에 비해서 후자가 사적인 일기여서 보다 구체적으로 밝혔다고 본다. 적어도 당시에는 이순신이 백의종군의 신분이었기 때문이다.

한편, 7월 22일 선조는 7월 16일에 원균의 수군이 대패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비국당상(備局堂上)을 인견하여 대책을 논의하라고 했다. 그러나 한동안 비국당상은 말이 없었다. 그만큼 충격이 컸던 것이다. 결국 다른 특별한 대책도 없이 논의만 분분하던 중 이항복(李恒福)이 나섰다. 이에 앞서 이항복은 체찰사로 영남에 있으면서 이순신의 나명(拿命) 소식을 듣자 적극적으로 반대하였던 인물이다. 이항복이순신의 삼도수군통제사 복귀를 적극적으로 주장하면서 수사(水使)를 차출하여 계책을 세워 방수하자고 하였다. 이에 선조가 동의하면서 이순신은 다시 삼도수군통제사에 제수되었다.

이순신은 초계 도원수부를 떠나 삼가, 수곡, 정수역, 십오리원(十五里院)[鳳溪驛, 현 사천시 곤명면 봉계리 원전], 곤양군 읍내를 거쳐 율치(栗峙)[현 사천시 곤양면 맥사리·서포면 대진리와 하동군 진교면 송원리 경계의 고갯길]를 넘어 율원역(栗院驛)[현 하동군 진교면 송원리 율원마을], 양포역(良浦驛)[현 하동군 진교면 양포리 대전방마을 서편 400지점)을 지나, 노량으로 가서 전황을 살펴보고 돌아오다가 7월 22일 오후에 곤양에 이르러 몸이 불편하여 잤다. 다음날 아침에 먼저 송대립(宋大立)을 시켜 전황을 담은 공문을 원수부에 전하게 하고, 십오리원을 거쳐 진주굴동의 전에 묵었던 곳에 이르러 잤다. 이후 옥종면정화리정개산성과 건너편 수곡면원계리에 머물면서 소촌찰방 이시경(李蓍慶) 등과 왜적과 맞싸울 대책을 논의하고, 덕천강 냇가에서 군사를 점검하거나 조련하였다. 8월 3일 진주 수곡에서 다시 삼도수군통제사에 제수한다는 교지를 받은 직후 임지로 떠났다. 그는 하동의 횡천·쌍계, 석주관, 구례, 곡성, 옥과, 순천, 낙안, 보성을 거쳐 장흥의 회령포에 진을 설치했다가 진이 좁아서 해남 북평으로 옮겼다. 그리고 8월 28일 왜적의 공격을 물리친 후 진을 장도로 옮겼고, 9월 16일 명량해전에서 극적인 승리를 거두게 된다.

[불패의 승전이 그를 죽음으로 내몰다]

이순신은 전라좌수사로서 거북선과 같은 전선을 건조하는 등의 수비에 철저하였으며, 그 효과는 불과 1년 3개월여 후인 1592년 5월 7일 옥포 해전의 승리로 증명되었다. 이후 당항포와 한산도, 부산포 해전에서 거둔 임진년의 승리는 그의 삶에서 욱일승천의 기회이자 그를 죽음으로 내몬 원인을 제공하였다.

이순신에게 임진왜란은 삶의 전부를 보여 주는 사건이자, 그의 삶을 대변하는 사건이었다. 그가 거둔 불패의 승전은 지금도 신화로 남아 있지만, 한편으로 그의 삶을 옥죈 사슬이기도 하였다. 임진왜란은 이순신이 장재(將材)를 마음껏 발휘할 수 있었던 시기이자 그를 생사(生死)의 갈림길로 몰아넣어 극단의 선택으로 이끌었던 사건이기도 했던 것이다.

이순신이 임진년 해전에서 연승을 거두자, 선조는 그의 해전에 과도한 기대를 가졌다. 1593년 2월 10일부터 3월 6일에 걸친 웅포해전 이후 적이 대적을 않고 피하자 이순신은 한동안 작전을 펼칠 수 없었는데, 선조의 입장에서 이것은 국치를 설욕할 수 있는 기회가 없다는 의미이기도 했고, 이순신을 부정적으로 보게 된 근본 원인이 되기도 했다. 어쨌든 이러한 상황과 맞물린 선조의 교유(敎諭)로 인해 이순신이 받았던 압박감은 상당해서, 이순신의 삶을 더욱 옥죄여 사력(死力)을 다하는 삶으로 몰아갔다.

1597년 1월 이순신은 조정을 가벼이 여기고, 임금을 속인 죄로 나국을 당하여 문초를 받았다. 그리고 사면을 받아 백의종군하였다가 원균의 패전으로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를 제수 받고 명량해전에서 거둔 승리는 극단적인 선택의 결과였다. 다음해 11월 19일 새벽녘 적의 귀로를 차단하고 치른 노량해전에서 적탄에 맞아 죽은 것 역시 승리와 죽음을 맞바꾼 극단적 선택의 결과라고 하겠다.

임진왜란은 이순신의 삶에 극적인 구성 요소를 추가하며, 그의 이미지에 소설적 형상화의 요소를 추가할 여지를 남겼다. 이순신의 삶은 현실에 있을 법한 소설적 형상화가 아니라 소설에 존재할 법한 현실의 삶이기도 했다.

[백의종군로 조성 사업]

경상남도와 전라남도는 각각 이순신 백의종군로를 복원했는데, 경상남도는 하동, 산청, 합천, 사천, 진주를 거치는 161.5㎞의 길을, 전라남도는 남원, 구례, 순천, 하동을 잇는 125㎞의 길을 고증을 거쳐 복원하며 역사 체험장과 문화 관광지 조성에 노력하고 있다. 백의종군로에는 탐방로와 유숙지, 야영장, 특산품 판매장 등이 들어서고 곳곳에 안내판과 길 유도판이 설치되고 있다. 하동의 경우 관광지로 유명한 화개장터와 ‘토지’의 무대인 악양면 평사리가 이순신 백군종군로에 포함되어 있다.이순신 백의종군로의 조성은 역사가 화석이 된 과거가 아닌 현재와 공존될 수 있고, 그럴 필요가 있음을 잘 보여 주는 사례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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