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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3401802
한자 守護-變革-河東
영어의미역 Hadong, the Land of Conservation and Innovation
분야 역사/전통 시대,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경상남도 하동군
시대 고려/고려,조선/조선,근대/개항기
집필자 박용국

[개설]

하동 지역은 남해섬진강을 끼고 있어 해상 교통이 편리할 뿐 아니라 경상도와 전라도의 접경지대로 오랜 옛날부터 지리적 요충지로서 주목 받았다. 이 때문에 일찍부터 도로와 시장이 발달하고 물산이 풍부했던 반면에 침략을 받기도 쉬운 이중적 특징을 가지고 있어서, 고려 후기에는 왜구의 잦은 침략을, 조선 시대에는 임진왜란을 겪었다. 그러나 정유(鄭愈)정기룡(鄭起龍) 같은 이들에 의해 외적을 물리칠 수 있었다.

하동 지역의 공간적 배경이 되는 지리산은 삼국 시대부터 신성한 곳으로서 중사(中祀)의 대상이었으며, 고려 시대 이인로(李仁老)[1152~1220] 이후 이상향인 청학동이 존재하는 곳으로 널리 알려졌다. 그리하여 사회 변혁 세력들은 지리산을 구체적인 구원의 장소이자 이상향을 실현할 수 있는 곳으로 주목했다. 『정감록(鄭鑑錄)』과 같은 비기(祕記)가 나돌고, 숙종 대 이후 성행하기 시작하는 미륵 세상을 갈망하는 사회 분위기에서 변혁 세력에게 지리산은 더 없는 의지처가 되었을 것이다. 이에 문양해(文洋海)가 주도한 ‘『정감록』 역모 사건’ 같은 것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한편, 조선 후기 농업 생산력의 발달과 상품 화폐 경제의 진전은 사회 계층의 분화를 촉진하였다. 이에 장시가 발전하여 사회 여론의 장으로 기능하면서 ‘하동 두치장 괘서의 변’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괘서·벽서로 시작하여 농민 봉기로 폭발되었던 반봉건 농민 항쟁은 개항 뒤 제국주의 열강의 침탈로 반제라는 과제를 하나 더 안게 된다. 이에 동학 농민 운동이 일어났으며, 개항기에는 국권을 수호하기 위한 의병 항쟁도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외적의 침입과 결사항전]

1. 고려 후기 왜구의 침입과 정유의 활약

하동군은 1172년(명종 2)에 이르러 비로소 감무(監務)가 두어지면서 진주목의 속군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행정 구역이 되었다. 고려 시대에는 하동의 토성(土姓)인 정씨들이 크게 활약했을 것으로 보이지만 정치·사회적 상황을 알려 주는 자료는 전하는 게 거의 없고, 여말(麗末) 왜구의 노략질 때 정유와 정손 형제의 활약상 정도가 남아 있을 뿐이다.

1372년(공민왕 21) 정유와 정손 형제는 아버지를 따라 하동군을 수비하고 있었다. 이때 왜구가 밤을 틈타서 하동을 침입하므로 모두 도망쳤는데, 마침 아버지 정임덕이 병으로 말을 탈 수 없었으므로 두 형제가 아버지를 부축하고 달아났다. 적이 따라오자 정유가 말을 타고 왜적 몇 명을 쏘아 넘어뜨렸다. 주저하던 왜구가 칼을 휘두르며 아버지에게 돌진하자 정손이 몸으로 맞서 싸워 적 네 명을 죽이고 간고분투(艱苦奮鬪)하여 적을 물리쳐 아버지를 지켜 냈으나 자신은 끝내 적의 손에 죽었다. 이 일이 조정에 알려져 정유에게 종부시승(宗簿寺丞)이 제수되었으며, 이 내용은 『고려사(高麗史)』 열전 효우 편의 ‘정유 조’에 나온다.

2. 임진왜란과 최기필·정기룡 장군

임진왜란은 1592년(선조 25) 4월 14일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와 소 요시토시[宗義智] 등이 거느린 1만 8700명의 일본 제1진이 부산포에 상륙하여 부산성을 공격함으로써 발발했다. 임진왜란은 사실상 일본의 기습 공격으로 시작되었다. 조선으로서 볼 때 전혀 예상을 못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일본이 대병력으로 기습해 들어와 한동안 군사적 열세에 놓였다.

1592년 5월 초순경 진주 지역은 경상우도의 나머지 거창·안음·함양·산음·단성·하동·곤양·사천과 함께 겨우 적의 침입을 모면하였다. 물론 의령은 곽재우(郭再祐) 의병군이 활동하기 시작하는 4월 22일 이후 4월 말에서 5월 초에 곽재우가 의령과 이웃 삼가·합천 등을 수복하자, 소문을 듣고 철거하는 적이 매우 많았다. 이렇듯 곽재우 의병군을 위시해 여기저기에서 의병이 편성되어 경상남도 서부 및 호남으로 왜적이 진출하는 것을 막았기 때문에, 이후 10월 제1차 진주성 전투 이전까지는 비교적 왜적으로 인한 피해가 적었다.

제1차 진주성 전투가 벌어지면서 인근 고을이 분탕질당하던 시기까지도 하동은 왜적으로 인한 직접적인 피해가 거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1592년 10월 제1차 진주성 전투 때 하동의 군사들이 부다현(富多峴)[어속령(魚束嶺), 현 진주시 사봉면과 함안군 군북면 경계의 고개]을 지키는 데에 동원되었다. 10월 1일, 왜군은 함안군의 동남쪽 경계를 분탕질하고 2일까지 주력군이 함안에 집결하였다. 그리고 그 선봉대가 바로 부다현을 급습하였다. 그리하여 매복해 있던 진주·사천·곤양·하동·단성·산음의 군사들이 많이 죽고 나머지는 무너져 흩어졌다. 이처럼 하동의 군사는 제1차 진주성 전투 때 부다현을 방어하는 데 동원되었다.

임진왜란 때 크게 활약한 하동 지역 인물로 최기필(崔琦弼)[1562~1593]이 있다. 최기필은 본관이 전주(全州), 자는 규중(圭仲), 호는 모산(茅山)으로, 제2차 진주성 전투 때 의병을 이끌고 성에 들어가 김천일(金千鎰)·최경회(崔慶會)·황진(黃進) 등 수성장(守城將)들과 합심, 분전하였던 인물이다. 6월 29일 성이 함락되자 남강에 몸을 던져 순국하였다. 뒤에 창렬사(彰烈祠)에 향사되고 병조참의에 추증되었다. 또 곤양[현 하동군 금남면] 출신 정기룡(鄭起龍)[1562~1622]은 왜적과의 여러 전투에서 거의 매번 승리를 거두었다. 이로 인해 명나라 제독 마귀(麻貴)는 이순신과 더불어 조선 최고의 양장(良將)이라 일컬었으며, 유격 모국기(茅國器)는 “육지에서는 정기룡 장군만한 인물이 없다.”고 말했다.

[민중이 꿈꾸는 새로운 세상]

1. 『정감록』과 무귀천의 세상

17세기 이후 양반 지배층 내부의 권력 다툼은 더욱 심해졌고, 숙종 조에는 붕당 간의 당쟁이 격화되어 정국이 자주 바뀌었다. 1728년(영조 4) 무신란을 기점으로 하동의 화개 지역을 포함하는 지리산은 지방 세력과 토호 세력 및 신흥 상인 계층이 지리산 이인(異人)의 예와 같은 하나의 구심점 아래 혁명의 공간으로서 의미를 갖게 되었다.

그리하여 문양해 등이 하동에서 이상 사회 구현을 목표로 『정감록』을 사상적 틀로 이용하여 동조 세력을 규합하고 거사를 추진했으나 1785년(정조 9) 2월 29일 전 현감 김이용(金履容)의 고변(告變)에 의해 사건이 만천하에 드러나며 실패하였다. 『정감록』 역모 사건은 1785년 2월 29일부터 3월 16일까지 고변자 김이용과 관련자를 심문하면서 하동의 문양해를 비롯해 이율(李瑮)·양형(梁衡)·홍복영(洪福榮)·주형채(朱亨采)·김두공(金斗恭) 등 연루자가 드러나게 된다.

문양해 등은 조선이 곧 망할 것이라면서 “이미 복지(卜地) 하동 선장촌(先場村)에 집을 지어 경영한 지가 오래인데, 차후의 세계는 무귀천일 것이니 이것을 마땅한 사업으로 삼아 새로운 세상을 열어 시조가 되자.”라고 하였다. 왕조를 부정하고 새롭게 도래할 무귀천(無貴賤)의 세상을 준비하기 위해서 하동 화개에 선장촌을 세운 것이다.

문양해 등이 주장하는 새로운 세상은, 왕조를 부정하는 『정감록』의 내용에 바탕을 두고는 있으나 지리산 하동에 구체적인 장소를 마련하고, 이를 근거지로 하여 새로운 세상의 도래에 대비했다는 점에서 보통의 역모 사건과 차이가 있다. 그들은 조선 왕조가 망할 것이라는 『정감록』의 예언을 빌려 왔지만 새로운 세상이 무귀천의 세상이라는 점을 내세웠다. 이 점은 『정감록』의 중세적인 지향성과 다른 혁명성을 내포하고 있었다.

2. 하동 두치장 괘서의 변

1801년(순조 1) 8월 초 하동부 관아에서 북으로 5리쯤 떨어진 섬진강 변의 두치장에서 괘서(掛書)[대자보] 사건이 발생했다. 조선 후기에는 휘몰아치는 사회 변화 속에서 일부 몰락한 양반층의 불만이나 농민 등 민중 세력이 이끄는 사회 변혁이나 국가에 대한 저항의 희망을 담아내는 비기·참서류 등이 많이 나돌고 있었다. 이런 것들은 자주 많은 사람을 선동하는 사건 형태로 나타나는 사례가 적지 않았는데, 두치장 괘서 사건도 마찬가지였다.

섬진강 변의 두치장은 영남과 호남의 사람들이 크게 모이는 대도회지였다. 매번 장날이면 섬진강을 거슬러 온 수백 척의 배가 해산물을 싣고 와서 풀어 놓고, 섬진강을 따라 내려온 배 10여 척이 육지에서 난 물산을 싣고 와서 섬진강 변에 줄지어 정박하였다고 전한다. 두치장은 당시 하동 지역의 사회 변혁 세력이 장날을 이용해 그들에게 동조하는 세력을 규합하려고 했을 만큼 사회·경제적 파급력을 갖고 있었다.

사회 변혁 세력은 그러한 장날을 이용해 많은 사람들을 선동하려던 목적에서 괘서를 내걸었다. 하동 두치장 장터 번잡한 곳에 세워져 있는 대나무 장대에 한 자 남짓한 흰 명주에 쓴 괘서가 매달려 있었다. 누군가가 밤새 세워 놓은 대나무 장대의 괘서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문무(文武)의 재예(才藝)가 있어도 권세가 없어 실업(失業)한 자는 나의 고취(鼓吹)에 응하고 나의 창의(倡義)에 따르라. 정승이 될 만한 자는 정승을 시킬 것이고 장수가 될 만한 자는 장수를 시킬 것이며, 가난한 자는 풍족하게 해 주고 두려워하는 자는 숨겨 준다.”

두치장 괘서는 누가 주도했는지 끝내 밝혀지지 않았지만 그 내용은 누구에게나 솔깃한 것이었다. 문무의 재능을 갖추었으나 쓰이지 못한 자에게는 마땅한 벼슬을 주고, 가난한 자는 풍족하게 해 주고, 도망한 자를 숨겨 줄 것이라고 하였다. 그들에게 동조하면 꿈을 이루어 줄 것이라고 하였다.

[열강의 침탈과 국권의 수호]

1. 동학 농민군의 고성산성 전투

1894년(고종 31) 1월 호남 지역에서 동학 농민군이 봉기하던 당시 하동 읍내에도 도소가 만들어져 동학도들이 활발하게 활동을 했다. 이는 그 해 6월 하동부사 이채연이 민보군을 조직하여 동학도를 몰아냈던 것에서도 잘 알 수 있다.

1894년 6월 일본군은 조선 조정의 철수 요구에도 궁성을 포위하여 고종을 협박하고, 청일 전쟁을 일으키는 한편으로 내정을 간섭하는 등 국권을 침략하였다. 이리하여 전라도에서 제2차 동학 농민군이 봉기하였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 하에 진주 지역에도 1894년 9월 광탄[너우니]에서 동학 농민군이 조직되어 봉기하였다.

진주·하동·곤양·남해·사천·단성 등지에서 모인 동학 농민군은 진주초차괘방(晉州初次掛榜)에서 “국가의 안위는 국민의 생사에 있고, 국민의 생사는 국가의 안위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찌 국가를 보호하고, 국민을 편안케 할 방도가 없어서야 되겠습니까.”라고 하면서 봉기했는데, 그 수가 자그마치 5,000여 명이나 되었다.

9월 1일 김인배(金仁培)가 이끈 호남의 동학 농민군은 하동부사에게 쫓긴 하동 지역 동학농민군의 안내를 받아 하동을 공격하여 점령한다. 이후 5~6일 머물던 동학 농민군 일부는 호남 지역으로 되돌아가고, 나머지는 총대장 김인배를 따라 진주로 향했다. 이와 거의 같은 시기에 진주 지역 곳곳에서 봉기한 동학 농민군이 광탄에 모여 기치를 올리고, 김인배의 동학 농민군은 9월 18~19일의 대회를 마친 후 19일 퇴거하기 시작했다.

9월 29일 후지사카[藤坂] 소위가 이끄는 부대가 하동을 침략하였다. 하동의 동학 농민군은 일본군과 싸워 섬진강 서안으로 패주했으나 이후 지속적으로 일본군을 괴롭혔다. 10월 10일 금오산에 있던 동학군 400여 명은 일본군의 기습을 받아 70여 명이 전사하고 많은 동학 농민군이 사로잡혀 크게 세력을 잃기도 하였다.

10월 14일 수곡촌 산야에 흩어져 있던 진주 지역 동학 농민군은 일본군이 수곡촌으로 침략해 오자 5,000여 명은 고성산성으로 들어가 수성(守城)에 나서고, 일부는 산청군 시천면 지리산 방향으로 물러났다. 고성산성의 동학 농민군은 일본군이 공격하자 정상의 성벽에 의지하여 강력히 저항하고, 시천 방면으로 물러났던 동학 농민군이 일본군 우측을 공격하였다. 재래식 무기로 무장한 동학 농민군은 신식 무기로 무장한 진주 주둔의 일본군 1개 중대와 치열하게 전투를 벌이다가 시천면 지리산으로 패퇴했다. 당시 일본의 보고서에 따르면 186명이 전사하고 수십 명이 부상했다고 한다. 이 전투 이후 진주 지역 동학 농민군은 크게 세력을 잃었지만, 깊은 지리산을 배경으로 끊임없는 저항을 이어 갔다가 다음해 을미 의병으로 흡수되기도 했다.

2. 개항기 의병 운동의 중심지

을미사변과 단발령 공포로 처음 일어난 의병 투쟁은 1905년(고종 42) 을사조약의 체결을 계기로 더욱더 격화되었고, 평민 출신 의병장들도 등장하기 시작했다. 특히 1907년(순종 1) 군대 해산 이후 장교와 군졸 들이 의병 투쟁에 가담하면서 대규모 의병 부대를 동원하는 것에서 소규모의 게릴라 전략을 구사하는 형태로 전략이 변모되고 발전되어 갔다.

하동 지역에서도 의병 부대의 활동은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당시 의병 활동을 주도했던 인물로 박매지(朴每之)·임봉구(任鳳九)·이성로(李成魯)·우수보(禹守甫)·김의홍(金義洪)·조기섭(趙奇攝)·손몽상(孫夢尙)·박홍지(朴弘之)·이백응(李百應)·김대수(金大守) 등이 있다. 특히 1907년 8월경 구례 연곡사에 있던 고광순 의병 부대에 합류하여 화개장터와 연곡사 등지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던 박매지·임봉구 등의 하동 의병대는 12월 이후 독자적으로 악양면에서 일본 수비대와 일본군과 전투를 벌이거나 하동 수비대를 습격하고 일진회원을 처단하였다. 박매지는 1909년 10월 진주 대평면 전투에서 체포되어 총살당하였다.

임봉구의 의병 부대는 1908년 7월 24일 양보에 있는 일어 학교를 방화하여 전소시키고, 25일에는 횡천면 토덕동에서 일진회원 장재수를 사살했다. 임봉구는 다음날인 26일 일본 경찰과 교전하다가 체포되었다. 9월경 이성로의 의병 부대는 일진회원 김성신을 사살하고 악양에서 친일파의 집 6동을 방화하였다. 또 우수보의 의병 부대도 9월 17일 일본인 첩자 쓰다 만끼지를 사살하고 일본군 18명을 사살하였다. 10월 5일 손몽상조기섭이 이끄는 의병 부대는 청암면 안양리에서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으며, 이 과정에서 손몽상·조기섭이 체포된 후 일본 수비대에 의해 총살당하였다.

이외에도 청암면·옥종면·악양면 등지에서 의병과 일본군과의 전투가 여러 차례 벌어진 것으로 나타난다. 위와 같은 전투로 인해 1907~1908년 사이 하동 지역 의병 1,500여 명 중 157명이 전사하고 수백 명이 부상당해 그 세력이 크게 약화되었다. 경상남도 지역 의병 활동에서 숫자와 교전 횟수의 80% 이상이 지리산을 근거지로 한 데서도 알 수 있듯이 하동 지역은 경상남도 의병 투쟁의 중심지였다. 이처럼 하동 지역은 예부터 외적에 대항해서는 국토를 수호하며, 봉건 세력에 대해서는 변혁을 꿈꾸던 ‘수호와 변혁의 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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