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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3401809
한자 河東-儒學者-學脈
영어의미역 The Confucian Scholars and Old School Ties in Hadong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경상남도 하동군
시대 조선/조선,근대/개항기
집필자 전병철

[개설]

하동 지역에서 활동한 유학자와 학맥에 관해 서술하기 위해서는 우선 시간적 범위를 어디까지로 제한할 것인가를 고려해야 한다. 그 다음으로 유학자의 정의를 무엇으로 설정할 것인가를 마련해야 한다. 그러므로 위의 두 가지 범위와 기준을 고려하여 다음과 같이 하동의 유학자를 규정하였다. 첫째, 시간적 범위는 유교를 국시(國是)로 삼은 조선의 건국으로부터 그 운명이 다하는 시점인 개항기에 이르기까지이다.

고려 시대 하동 출신의 인물로는 강민첨(姜民瞻), 정세유(鄭世裕), 정숙첨(鄭淑瞻), 정안(鄭晏), 정지상(鄭芝祥), 정지연(鄭芝衍), 정혼(鄭渾) 등이 있다. 그들은 과거에 급제하여 관료 생활을 하였으며, 독서를 하고 글을 저술하는 등 학자적인 면모를 지녔다. 하지만 그들을 학자라는 범위에 포함시키는 것은 가능하겠지만 유학자로 규정할 수 있는가에 관해서는 분명하지 않다. 고려 시대에는 유교보다는 불교를 숭상하였으므로 학자라 할지라도 순수한 유학자라고 확정지을 수 없기 때문이다.

둘째, 유학자의 정의는 유학과 관련한 구체적 활동이 기록으로 남아 있느냐를 기준으로 삼는다. 유학 경전에 대한 탐구, 유학적 관점에 입각하여 자신을 수양한 내용, 유학의 계승과 수호를 위해 스승을 찾아가거나 제자를 양성한 사실 등이 기록으로 전해지는 경우 이들을 유학자로 포함시킬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서는 위의 두 가지 기준에 근거해 하동 지역 유학자와 학맥을 세기별·지역별·학파별로 나누어 개관하기로 한다.

[하동 지역 유학자의 세기별 분포]

하동 지역 유학자의 세기별 분포의 기준은 출생 연도를 기준으로 삼는다. 활동 시기를 기준으로 삼을 경우 두 세기에 걸쳐 있는 유학자들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출생한 연도를 기준으로 세기별로 구분하였다.

15세기에는 지족당(知足堂) 조지서(趙之瑞)[1454~1504]가 있었다. 16세기에는 모산(茅山) 최기필(崔琦弼)[1562~1593], 겸재(謙齋) 하홍도(河弘度)[1593~1666]가 있었다. 17세기에는 낙와(樂窩) 하홍달(河弘達)[1603~1651], 삼함재(三緘齋) 김명겸(金命兼)[1635~1689], 설창(雪牕) 하철(河澈)[1635~1704], 양정재(養正齋) 하덕망(河德望)[1664~1743], 주담(珠潭) 김성운(金聖運)[1673~1730], 한계(寒溪) 하대명(河大明)[1691~1761], 괴전와(愧全窩) 하대관(河大觀)[1698~1776]이 있었다. 18세기에는 국헌(菊軒) 하달성(河達聖)[1734~1791], 중은(重隱) 강석좌(姜錫佐)[1777~1853]가 있었다.

19세기에는 월촌(月村) 하달홍(河達弘)[1809~1877], 간취당(澗翠堂) 정우빈(鄭瑀贇)[1823~1892], 효재(嘐齋) 정원항(鄭元恒)[1823~1905], 월고(月皐) 조성가(趙性家)[1824~1904], 계남(溪南) 최숙민(崔琡民)[1837~1905], 두산(斗山) 강병주(姜柄周)[1839~1909], 월산(月山) 조성주(趙性宙)[1841~1918], 니곡(尼谷) 하응로(河應魯)[1848~1916], 해사(海史) 정돈균(鄭敦均)[1855~1941], 석전(石田) 문진호(文晉鎬)[1860~1901], 수재(守齋) 정봉기(鄭鳳基)[1861~1915], 수당(修堂) 최경병(崔瓊秉)[1865~1939], 사와(士窩) 하재도(河載圖)[1869~1931], 신암(愼庵) 최긍민(崔兢敏)[1883~1970], 청천(晴川) 정기식(鄭基軾)[1884~1958], 담헌(澹軒) 하우선(河禹善)[1894~1975]이 있었다. 20세기 초에는 굴천(屈川) 이일해(李一海)[1905~1987], 경재(敬齋) 김기주(金璣柱)[1907~1977]가 있었다.

하동 지역 유학자의 세기별 분포를 살펴볼 때, 15세기 1명, 16세기 2명, 17세기 7명, 18세기 2명, 19세기 16명, 20세기 초 2명으로, 가장 비율이 높은 시기는 19세기이며, 그 다음이 17세기이다. 이러한 분포는 매우 흥미로운 점을 지니고 있다. 왜냐하면 경상우도 지역은 남명(南冥) 조식(曺植)의 학문을 계승한 남명학파(南冥學派)가 주도적 역할을 담당했는데, 남명학파의 성쇠에 따라 하동 지역의 유학자도 비례하여 산출되기 때문이다.

17세기는 ‘남명 이후에 일컬어질 만한 오직 한 사람[世稱南冥後一人]’이라는 칭송을 받은 겸재 하홍도하동군 옥종면 모한재(慕寒齋)에서 활동한 시기이다. 따라서 김성운을 제외하고는 모두 겸재 하홍도와 연관된 유학자들이다. 1623년(광해군 15)의 인조반정 이후로 남명학파는 매우 큰 타격을 입었지만, 오히려 17세기까지는 그 명맥이 유지되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18세기는 겉으로 나타나기에는 남명학파가 없어진 것처럼 보일 만큼 침체된 상황이다.

1796년(정조 20) 정조남명 조식을 배향한 덕천서원에 친제사제문(親製賜祭文)을 내려 특별한 관심과 존모의 마음을 표하였다. 이후 경상우도 지역에서는 마치 복류(伏流)로 흐르던 물이 밖으로 거세게 솟구쳐 오르듯이, 학식과 덕행이 뛰어난 학자들이 대거 출현하였다. 노백헌(老柏軒) 정재규(鄭載圭), 월고 조성가, 계남 최숙민, 한주(寒洲) 이진상(李震相), 만성(晩醒) 박치복(朴致馥), 단계(端磎) 김인섭(金麟燮), 물천(勿川) 김진호(金鎭祜), 면우(俛宇) 곽종석(郭鍾錫) 등이 바로 이러한 인물들이다.

이들은 겉으로 보기에는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 성재(性齋) 허전(許傳), 정재(定齋) 유치명(柳致明) 등 각기 다른 사승을 가졌지만, 학파를 초월하여 함께 교유하고 강학하였다. 학파적·당파적 입장을 달리하면 교유가 거의 불가능했던 조선 시대의 편당성을 생각해 볼 때, 이들이 초학파적 교유와 학문 활동을 할 수 있었던 까닭은 그들의 학문적 연원이 남명학파에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러한 일군의 학자들도 남명학파라는 범위로 묶을 수 있는 가능성이 그 속에 내재되어 있다. 그리고 19세기 하동 지역에서 유학자들이 대거 산출되는 원인도 이와 같은 남명학파의 부흥이라는 시대적 추이에 따른 것이라 말할 수 있다.

[하동 유학자의 지역별 분포]

옥종면에는 지족당 조지서, 겸재 하홍도, 낙와 하홍달, 설창 하철, 양정재 하덕망, 한계 하대명, 괴전와 하대관, 국헌 하달성, 중은 강석좌, 월촌 하달홍, 월고 조성가, 계남 최숙민, 두산 강병주, 월산 조성주, 니곡 하응로, 해사 정돈균, 수재 정봉기, 사와 하재도, 신암 최긍민, 담헌 하우선, 굴천 이일해가 있었다. 북천면에는 모산 최기필, 삼함재 김명겸, 주담 김성운, 석전 문진호, 수당 최경병, 경재 김기주가 있었다. 금남면에는 효재 정원항이 있었다. 양보면에는 청천 정기식이 있었다.

하동 유학자의 지역별 분포를 살펴보면, 총 30명의 유학자 가운데 옥종면이 22명으로 가장 많으며, 그 다음으로 북천면이 6명, 금남면양보면이 각각 1명이다. 또한 하홍도, 하홍달, 하철, 하덕망, 하대명, 하대관, 하달성, 하응로, 정돈균, 하재도, 하우선 등 11명은 옥종면 안계리 출신의 유학자들로서 옥종면 유학자의 절반이 넘는 비율을 차지하며, 전체 하동군 유학자의 3분의 1에 해당한다. 이러한 통계를 근거로, 하동 유학의 중심지는 옥종면이며, 그 중에서도 안계리가 핵심 지역이라고 규명해 볼 수 있다.

[하동 유학의 학파별 분류]

송정(松亭) 하수일(河受一)의 문인으로는 하홍도가 있었다. 하홍도의 문인으로는 김명겸, 하철이 있었다. 허전의 문인으로는 정우빈, 강병주, 하응로가 있었다. 기정진의 문인으로는 조성가, 최숙민, 조성주가 있었다. 하달홍의 문인으로는 하응로, 정돈균이 있었다. 정돈균후산(后山) 허유(許愈)[1833~1904]의 문인이기도 했다. 면암(勉庵) 최익현(崔益鉉)[1833~1906]의 문인으로는 정봉기가 있었다. 정봉기연재(淵齋) 송병선(宋秉璿)[1836~1905]의 문인이기도 했다.

최숙민의 문인으로는 최경병이 있었다. 물천(勿川) 김진호(金鎭祜)[1845~1908]의 문인으로는 정돈균이 있었다. 곽종석의 문인으로는 정돈균, 최긍민, 정기식, 하우선, 이일해가 있었다. 대계(大溪) 이승희(李承熙)[1847~1916]의 문인으로는 정기식이 있었다. 최경병[1865~1939]의 문인으로는 김기주가 있었다. 회봉(晦峰) 하겸진(河謙鎭)[1870~1946]의 문인으로는 정기식, 이일해가 있었다.

하동 지역의 학파별 분류를 살펴보면 하수일, 하홍도, 허전, 하달홍, 허유, 김진호, 곽종석, 이승희, 하겸진 등 남명학파 및 남인 계열 학자의 문인이 11명이다. 그리고 기정진의 문인 3명, 최익현송병선의 문인 1명, 최숙민의 문인 1명, 최경병의 문인 1명인데, 최숙민최경병노사 기정진의 학문을 계승한 것을 생각한다면, 6명 중에서 노사학파에 속한 인물이 5명에 해당한다.

그러므로 하동 지역 유학자의 학파별 분포는 남명학파 및 남인 계열이 대다수를 차지하며, 그 다음으로 노사학파의 문인이 많은 비중을 가진다. 경상우도는 남인 계열의 학자가 월등히 우세한 위치에 있는 지역임에도 하동 지역에 기정진의 학문이 대를 이어 계승되고 있는 점은 주목할 만한 부분이다. 그 까닭을 생각해 볼 때, 이는 기정진 문하에서 수학한 하동 출신의 조성가, 조성주, 최숙민 등이 학식과 덕행이 뛰어났을 뿐만 아니라, 하동을 비롯한 경상우도 지역에서 폭넓은 강학 활동과 교유 관계를 가졌기 때문이라고 판단된다.

[하동의 지리적 특성과 노사학의 유입]

앞에서 서술했듯이, 하동 지역은 남명학의 핵심 지역이라고 일컬을 만큼 남명학파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학자들이 대거 배출된 곳이다. 조선 시대에는 하동이 진주목에 속했으므로 남명학파가 진주를 중심으로 형성되고 전파된 사실과 연관 지어 생각해 볼 때, 하동 유학의 학문적 연원이 남명학에 근원하고 있음은 당연한 귀결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19세기에 이르러 조성가, 최숙민, 조성주 등과 같은 학자들이 전라남도 장성에서 활동한 기정진의 문하에 나아가 수학한 것은 매우 이채로운 현상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는 대략 두 가지 정도로 그 이유를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19세기의 시대적 상황을 그 이유로 들 수 있다. 영조정조 이후 탕평책의 실시와 향전(鄕戰)의 금지로 당쟁이 점차 완화되었으며, 18~19세기에 들어 크게 성장했던 새로운 유학층(幼學層)은 당색에 구애될 필요성이 비교적 적었다. 따라서 가문의 지위를 높이고 개인의 학문을 연마하기 위해 당색의 제한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교유 및 사승 관계를 형성할 수 있었던 것이다.

둘째, 하동은 섬진강을 사이에 두고 전라도와 접경한 지역으로, 물길을 이용해 상호간의 교통이 원활하게 이루어질 수 있었다. 조성가의 「사상일기(沙上日記)」을 살펴보면, 조성가기정진에게 배우러 가기 위해 옥종면 월횡리에서 출발하여 청암-하동읍-화개동과 구례 천변-곡성 오지촌-창평 등을 거쳐 장성에 도착했는데, 이 경로는 주로 섬진강의 물길을 따라 이동한 것이다. 따라서 조성가를 비롯한 하동의 유학자들이 기정진의 문하에 나아가 배울 수 있었던 까닭은 하동이 전라도와 접경한 지역일 뿐만 아니라, 섬진강의 물길을 따라 편리하게 이동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이유로 인해 하동 지역은 남명학의 핵심 지역이라는 학문적 연원과 함께, 기정진의 학문을 새롭게 수용하여 학문적·학파적 다양성이 공존하는 특색을 갖게 된 것이다. 이러한 하동 지역 유학의 특징은 19세기라는 역사적 배경이 중요하게 작용했겠지만, 더욱이 진주목에 속하면서도 섬진강을 끼고 전라도와 접경한 지리적 특성을 가지지 못했다면 결코 형성될 수 없었던 것이라고 판단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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