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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3401933
한자 良浦驛
영어의미역 Yangpo Station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제도/법령과 제도
지역 경상남도 하동군 진교면 양포리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박용국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제정 시기/일시 1462년연표보기
폐지 시기/일시 1894년연표보기
관할 지역 경상남도 하동군 진교면 양포리 지도보기

[정의]

조선 시대 경상남도 하동군 진교면 양포리에 설치된 역참.

[제정 경위 및 목적]

양포역(良浦驛)은 1462년(세조 8) 역로 정비 때 소촌도(召村道) 역승이 관할하는 16곳의 역 가운데 하나였다. 양포역은 곤양군에서 남해현까지 효율적인 교통과 통신망의 구축을 목적으로 지금의 하동군 진교면 양포리에 설치된 역참이었다.

[관련 기록]

『세조실록(世祖實錄)』에 따르면 1462년 8월 5일 병조의 건의로 각 도의 역참을 파하고 역로를 정비하여 찰방과 역승을 두었다. 이때 하동 지역에는 사근도(沙斤道) 역승이 관할하는 15곳 속역에 포함된 평사역(平沙驛)·정수역(正守驛)·율원역(栗院驛)·마전역(馬田驛)·횡보역(橫甫驛), 소촌도 역승이 관할하는 16곳 중 하나인 양포역을 두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권31 경상도 곤양군의 역원조에 “양포역은 현의 서쪽 25리 지점에 있다”라고 나온다. 『여지도서(輿地圖書)』 경상도 곤양군 역원조에 “양포역은 군의 서쪽 25리에 있고, 남쪽으로 남해 덕신역(德信驛) 30리, 북쪽으로는 완사역 40리 거리에 있다. 기마(騎馬)[사람이 타는 말] 3필, 복마(卜馬)[짐 싣는 말] 3필, 역리(驛吏) 11명, 노(奴) 12명, 비(婢) 6구(口)”라고 나온다. 『대동지지(大東地志)』 곤양군의 역참조에 “완사역은 북으로 18리, 양포역은 서로 25리에 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내용]

양포역은 곤양군의 서쪽 25리, 남쪽으로 남해 덕신역의 30리, 북쪽으로 완사역의 40리 거리에 있었다. 이 역에는 기마 3필, 복마 3필, 역리 11명, 노 12명, 비 6명을 갖추고 있었다. 남쪽으로 남해현의 덕신역, 북쪽으로 하동도호부율원역을 이어주는 역로에 위치하였다. 양포역에서 율원역까지 거리는 4.5㎞쯤 떨어져 있다. 율원역은 동쪽으로 곤양군 읍치까지 약 5.5㎞, 서쪽으로 하동의 옛 읍치 고전까지 8㎞쯤 떨어져 있다. 따라서 율원역은 동서로 하동과 곤양을 이어주는 역임과 동시에 남으로 남해에 이르는 삼거리에 위치하는 역이었다.

남해 덕신역에서 출발하여 노량을 건너 역로가 금오산[849m] 동쪽과 서쪽으로 갈라지는데, 양포역은 동쪽 역로에 위치한다. 서쪽 역로는 하동군 금남면 대송리 원동마을에서 북쪽으로 가면 고전면 옛 읍치와 갈치녹재를 거쳐 하동도호부 읍치에 이른다. 양포역은 지방도 1002호를 따라 하동군 금남면 대치리·중평리, 중평리하동군 청소년수련원에서 약 1.3km 쯤에 나오는 삼거리에서 지방도를 벗어나는 달구지길을 따라 900m쯤 가면 대한양돈협회 공인제2종돈능력검정소가 나오는 지점에서 약 300m에 위치하였다. 이곳에서 서쪽으로 난 길을 따라 조금 가면 달구지들이 나오고, 개울 건너 하동군 진교면 고룡리 남양마을양포역에 달린 원동이었다.

[변천]

양포역은 1462년(세조 8) 역로를 정비할 때 진주 소촌도 역승이 관할하던 16곳 가운데 한 역이었다. 양포역이 포함된 금양부곡은 원래 진주목의 월경지였으나, 1437년(세종 19) 곤명현에 합쳐져 곤양군이 되었다. 이후 양포역은 곤양군에 속하였다. 1894년(고종 31) 갑오개혁 때 역원 제도가 폐지될 때 소멸되었다. 양포역이 포함된 금양 지역은 1895년 곤양군 금양면이 되었다.

1914년 곤양군 금양면이 하동군에 편입되고, 1933년 1월 1일 금양면의 고룡리·양포리·안심리하동군 진교면에 편입되었다. 양포역은 오늘날 하동군 진교면 양포리에 위치하였으며, 이에 딸린 원은 바로 이웃인 진교면 고룡리 남양마을 달구지들 인근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의의와 평가]

양포역은 조선 시대 곤양군에서 남해현에 이르는 교통과 통신에서 큰 기능을 한 역이다. 1504년(연산군 10) 4월 4일, 갑자사화에 화를 입은 이세좌(李世佐)남해로 귀양 가다가 양포역에 이르렀다. 같은 날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 안처직(安處直)이 양포역에 도착하여 자진(自盡)하라는 왕명을 전하자 스스로 목을 매어 죽었다. 한편 양포역은 백의종군하던 이순신(李舜臣)이 1597년(선조 30) 7월 21일 전황을 살펴보기 위해서 남해에 갈 때 들렀던 곳이기도 하다. 이처럼 양포역은 역사적 사건과 관련된 장소로서 의미도 적지 않은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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