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10097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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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孝子任泰春旌閭 |
영어공식명칭 | Monument for Filial Son Im Tae-chun(Hyoja Im Tae-chun Jeongnyeo) |
분야 | 종교/유교,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건물 |
지역 | 충청남도 아산시 염치읍 쌍죽리 128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여송은 |
건립 시기/일시 | 1843년 - 효자 임태춘 명정이 내려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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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 시기/일시 | 1989년 - 효자 임태춘 정려 현재 위치로 이건 |
현 소재지 | 효자 임태춘 정려 - 충청남도 아산시 염치읍 쌍죽리 128번지[아랫대실] |
원소재지 | 효자 임태춘 정려 - 충청남도 아산시 염치읍 쌍죽리 윗대실 |
성격 | 정려 |
양식 | 겹처마 맞배지붕 |
정면 칸수 | 1칸 |
측면 칸수 | 1칸 |
[정의]
충청남도 아산시 염치읍 쌍죽리에 있는 효자 임태춘의 조선 후기 정려.
[개설]
임태춘(任泰春)[1751~1811]은 충청남도 아산시 염치읍 쌍죽리에서 출생한 조선 후기 영조 때의 학자로 본관은 풍천(豊川), 자는 자인(子仁), 호는 농옹(聾翁)이다. 증조할아버지 서재 임징하가 옥사를 겪은 이후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세상과 거리를 두고 은거하였다. 귀머거리 늙은이라는 뜻의 호[농옹(聾翁)]에서 보여 주듯 임태춘도 벼슬에 뜻을 접고 학문과 효행을 실천하며 살았다.
임태춘은 천성이 학문을 즐기고 효성이 지극하여 어려서부터 마을에 이름이 자자하였다. 부모님께 공경의 효를 다하고 봉양하였으며, 부모님의 병환 중에는 지극정성으로 간호하였다. 병이 위중할 때에 여러 가지 약을 써도 효험이 없자, 자신의 손가락을 베어 피를 드시게 할 정도였다. 이러한 효행이 임태춘이 죽은 후 이조참판 조두순(趙斗淳)에 의해 조정에 알려져서 1843년(헌종 9)에 효자 정려를 받게 되었고, 1875년(고종 12)에는 이조참의에 증직되었다.
[위치]
효자 임태춘 정려는 아산시 염치읍 쌍죽리에 있다. 염치읍사무소 서쪽 200여m 지점의 삼거리에서 북쪽의 마을길[쌍죽길]로 600여m 올라가면 왼쪽 길가에 효자 임태춘 정려가 서 있다. 쌍죽리 아랫대실마을 입구가 되며, 본래 정려의 위치는 쌍죽리의 윗대실에 있었는데 1989년에 현재 위치로 옯긴 것이다.
[형태]
효자 임태춘 정려의 정려각은 정면과 측면 모두 1칸의 단칸이며 콘크리트 기단 위에 낮고 넓은 원형 주춧돌 위에 기둥을 세웠다. 사면은 하방 이하만 붉은 벽돌로 3단을 쌓았고 그 위는 홍살을 세웠다. 이익공 위에 겹처마에 맞배지붕을 올렸으며, 측면에 방풍판을 설치하였다. 정려 내부 중앙에 명정 현판이 걸려 있고, 뒷면에 정려기와 중수기 편액을 걸어 놓았다. 명정 현판에는 ‘효자 증통정대부이조참의임태춘지려 숭정이백십육년 헌묘계묘삼월일명정(孝子贈通政大夫吏曹參議任泰春之閭崇禎二百十六年憲廟癸卯三月日命旌)’이라고 쓰여 있고, 정려기는 조두순(趙斗淳)이 지었다.
[의의와 평가]
아산시 염치읍 쌍죽리는 동쪽에 인접한 동정리와 함께 임진왜란 이후 풍천임씨의 세거지가 되었다. 효자 임태춘 정려는 문중과 마을의 기품을 보여 주는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쌍죽리는 효자 임태춘의 정신을 이어받아 1998년 아산시로부터 효도마을로 지정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