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창현공북정기」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101374
한자 新昌縣拱北亭記
분야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역사/전통 시대
유형 작품/문학 작품
지역 충청남도 아산시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이승은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저자 생년 시기/일시 1420년 - 서거정 출생
저자 몰년 시기/일시 1488년 - 서거정 사망
편찬|간행 시기/일시 1705년 - 「신창현공북정기」가 수록된 서거정의 『사가집(四佳集)』을 족손(族孫) 서문유가 간행
배경 지역 공북정 - 충청남도 아산시 신창면 읍내리 지도보기
성격 기문(記文)
작가 서거정

[정의]

서거정이 지은 충청남도 아산시 신창면공북정에 대한 기문.

[개설]

「신창현공북정기(新昌縣拱北亭記)」충청남도 아산시 신창면공북정(拱北亭)이 지어진 시기와 유래, 정자의 이름에 담긴 의미를 알 수 있는 자료이다. 충청남도 아산현의 신창수령 조군유(趙君愉)[『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조침(趙侵)으로 기록되어 있음]가 공북정을 지었고, 윤자운(尹子雲)[1416~1478]이 서거정(徐居正)[1420~1488]에게 기문(記文)을 부탁하였다. 서거정은 자신이 두 번이나 신창을 지났으나 자세히 둘러보지 못했던 일을 회고하며 ‘공북(拱北)’이라는 이름의 의미를 설명한다.

[내용]

서거정은 두 번 신창을 지난 적이 있었는데, 1456년 청주에서 공주로 가는 길에 신창에 들러 태수 김률(金慄)을 만났고, 몇 년 뒤 호남으로 가는 길에 또 한 번 들러 태수 윤호(尹壕)를 만났다. 김률과 윤호에 따르면, 신창은 땅이 좁고 사람이 적으며 토지가 척박하고 생산이 적은데, 아전은 교활하고 고집스럽고 사나우며 백성은 어리석고 분쟁이 심한 고을이었다. 조군유가 부임한 이후 정치가 편안해졌고, 관청과 정자가 새로워졌다는 말을 듣고 즐거운 마음으로 기문을 지었다. ‘공북(拱北)’은 『논어』「위정(爲政)」에 "정치를 덕으로 하는 것은, 비유하자면 북신[北辰]이 제자리에 있고 뭇별들이 그 둘레를 싸고 있는 것과 같다"는 말에서 따온 것으로, 정자에서 술을 마시고 시를 읊는 자들이 멀리 대궐 쪽을 바라보면서 서울이 있는 북쪽 하늘을 가리키며 밥 한 끼 먹는 사이에도 항시 임금을 잊지 않을 것이라는 의미를 부여하였다. 서거정은 이를 칭찬하며 벼슬에서 물러난 후 경기도 평택의 고향으로 돌아가면 정자에 들러보겠다는 말로 기문을 마무리하고 있다.

[형태/서지]

「신창현공북정기」는 『사가집(四佳集)』 권1에 수록되어 있다. 『사가집』의 크기는 가로 14.6㎝, 세로 20.0㎝이며, 각 면 12행 19자이다. 국립중앙도서관과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에 소장되어 있다.

[의의와 평가]

「신창현공북정기」는 당대 최고의 문한(文翰)이었던 서거정의 글을 통해, 공북정의 유래와 당대 지배층의 신창에 대한 인식과 평가를 엿볼 수 있는 흥미로운 자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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