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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 경상남도 하동군에 두었던 불과 연기를 이용한 통신 수단과 시설. 봉수(烽燧)는 횃불[烽]과 연기[燧]로 변방의 위급한 상황을 본읍(本邑)과 중앙에 전달하던 군사적 목적의 통신 수단과 시설로서 고대부터 1894년까지 사용되었다. 봉수제는 중국에서 유래했으며, 우리나라에도 이미 삼국 시대에 도입되었을 것으로 추정하지만 확실한 기록은 12세기 초기에 보인다. 1123년(인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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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하동군에 있는 흙이나 돌로 축조한 방어 시설. 성은 집단의 공동 목적과 더불어 소수의 수비군이 다수의 침략군을 효과적으로 격퇴하거나 침공 속도를 늦추어 후방이 대비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를 얻기 위한 방어용 건축물이다. 따라서 성은 인류 역사에서 지배와 피지배 관계가 발생하고, 국가가 성립하면서 나타나는 환호(環濠)와 목책과 같은 방어 시설, 습지에서 발달한 환호취락(環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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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7년부터 고려 전기까지 경상남도 하동군에 설치된 지방 행정 구역. 『삼국사기(三國史記)』 지리지에 의하면 “하동군은 본시 한다사군으로, 경덕왕이 [하동으로] 이름을 고쳐 지금도 그대로 되어 있는데, 영현(領縣)이 셋이다. 성량현은 지금 금양부곡(金良部曲)[지금 하동군 금남면]이요, 악양현(嶽陽縣)은 본시 소다사현인데 경덕왕이 [악양으로] 개명하여 지금도 그대로 되어 있다[지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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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사 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경상남도 하동군의 역사. 하동의 역사는 문자로 기록되기 이전의 선사 시대와 그 이후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현재까지 하동 지역에서 확인된 선사 시대의 유적은 하동군의 동북쪽 덕천강 유역과 서남쪽 섬진강 유역 일대에 집중 분포하고 있다. 하동의 역사는 수습된 유물을 통해서 보면 구석기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초기 철기 시대에 이르러 작은 정치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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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하동군 지역에서 고려 시대부터 1894년까지 운영되었던 교통·통신 및 숙박 시설. 역원(驛院)은 역관(驛館), 역참(驛站), 우역(郵驛)이라고도 한다. 역은 역마(驛馬)와 역로(驛路)를 관리하고, 공무로 지방을 다니는 관리에게 역마와 숙식 등을 제공하는 곳을 말한다. 우리 역사에서 역원제의 시초는 487년(소지왕 9) 신라 소지왕(炤知王) 대 우역(郵驛)의 설치에서 찾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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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시대부터 1894년까지 경상남도 하동군 옥종면 정수리에 설치된 교통 통신 기관. 정수역(正守驛)은 고려 시대 산남도(山南道) 관할의 28개 역 가운데 하나로 설치되었다. 설치 목적은 중앙과 진주목(晉州牧)[하동군] 간의 효율적인 관계망의 구축을 위해서 요로(要路)인 지금의 하동군 옥종면 정수리 영당마을에 두었던 교통과 통신을 위한 시설이었다. 『고려사(高麗史)』 권82, 병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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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 하동 출신의 문신. 본관은 하동(河東). 자는 열지(悅之), 시호는 문경(文景). 아버지는 사헌집의(司憲執義)를 지낸 정희(鄭熙)이다. 정심(鄭深)과 정황(鄭況) 두 아들이 있다. 정초(鄭招)는 1405년(태종 5) 문과에 급제하고 1407년(태종 7) 중시(重試)에 합격하여 사헌집의와 판군자감(判軍資監), 승문원사(承文院事)를 차례로 역임하며 경연시강관(經筵侍講官)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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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 하동 출신의 관인(官人) 본관은 진양(晉陽). 아버지는 하승해(河承海)이고, 형은 양정공(襄靖公) 하경복(河敬復)[1377~1438]이다. 하경리(河敬履)는 북방 수호에 헌신하는 형을 대신하여 진주를 중심으로 지곤남군사(知昆南郡事), 지사천현사(知泗川懸事) 등 아홉 고을의 수령직을 역임하면서 노모를 극진히 봉양하고 선정(善政)을 베풀었다. 세종은 하경리 형제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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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 하동 출신의 무신. 하경복(河敬復)은 천성이 관후(寬厚)하고, 용모와 몸가짐이 아름다웠으며, 활쏘기에 능하였다. 조선 개국 초기 국가의 무비(武備)를 위하여 많은 공로를 세워 국가의 기틀을 견고하게 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본관은 진양(晉陽). 아우는 하경리(河慶履)이고, 아들은 하한(河漢), 손자는 하숙보(河叔溥)이다. 하경복은 1402년(태종 2) 무과에 급제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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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4년부터 1895년까지 경상남도 하동군에 설치된 지방 행정 구역. 조선 시대에 들어 하동의 읍치는 자주 변경되었으나, 읍격(邑格)에는 큰 변화가 없이 이어져 오다가 18세기 접어들어 읍의 규모와 읍격에 변화를 겪었다. 1702년(숙종 28) 하동 읍민들이 섬진강 일대를 관문으로 삼을 것을 호소하자, 진주목의 악양·화개·진답·적량의 4개 면을 임금의 윤허를 받아 하동으로 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