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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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 지역 동학 농민군이 1894년 10월 14일 경상남도 하동군 옥종면 북방리에 있던 고성산성에서 일본군을 상대로 벌인 전투. 봉건적 지배 체제하의 농민층은 여러 가지 수탈에 시달리는 가운데 1876년 개항 이후 제국주의의 경제적 침탈로 인해 삶이 더욱 피폐해지자 생존권을 위협받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여기에 더하여 동학이 교세를 확장하는 과정에서 탄압을 받게 되면서 동학도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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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하동군에 있는 교육 기관, 시설 및 관련 시책. 인류의 발생과 더불어 시작된 생활의 근본이자 그 자체인 교육은 몇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우선 법에 따라 자격증을 가진 교원들이 의도적 목적에 따라 학습 지도를 하는 제도화된 교육으로서 학력과 학위를 인정받은 형식적 교육이 있다. 또 의도적으로 이루어지는 교육이지만 공식적인 학위를 받거나 학력을 인정받지 못하는 비형식적 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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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와 개항기 하동의 열녀. 본관은 광산(光山). 남편은 김경좌(金慶佐)로, 본관은 김해(金海)이다. 김경좌 처 광산 김씨는 18세에 지금의 경상남도 하동군 고전면 대덕리로 시집을 왔다. 효심으로 시부모를 정성껏 모시고 남편에게는 유순했으며 동서 간에는 우애롭게 지냈다. 1871년(고종 8) 봄에 남편이 병에 걸리자 하인을 시키지 않고 몸소 약을 달이고 죽을 쑤어 간병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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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하동군 청암면 중이리에 있는 김성행(金聖行)의 효행을 기리는 비. 하동군 청암면 중이리에 살았던 효자 김성행은 부모를 극진히 섬기고, 나이 적은 계모 홍씨를 지극 정성으로 보살펴 효도를 다했다. 먼 곳의 농사일을 끝내고 밤중에 돌아올 때 호랑이가 길을 인도하였다는 전설이 있다. 1890년(고종 27) 고종이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을 제수하였다. 1925년 마을 주민들이 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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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하동군 고전면 성천리에 있는 개항기 김수직(金守直)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세운 정려각. 김수직은 본관이 용궁(龍宮)이며, 자는 겸지(兼之)이다. 1794년(정조 18)에 태어났으며, 낭선재(浪仙齋) 김태백(金太白)의 후손이다. 천성이 순후하여 부모를 섬기는 데 여름에는 생선을 구하여 봉양하였고, 겨울에는 미음을 준비하여 공양하였다. 아버지가 종기를 앓자 여러 달 동안 입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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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하동 출신의 의병. 김의홍(金義洪)은 1886년 지금의 경상남도 하동군 악양면 입석리에서 태어났다. 김병원(金炳源)으로도 불렸다. 1907년은 헤이그 밀사 사건과 그에 따른 고종의 강제 퇴위, 정미7조약[일명 한일신협약]에 의한 한국의 통치권 약화, 한국군 강제 해산 등으로 각지에서 의병 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났다. 김의홍은 1907년 8월부터 고광순(高光洵), 박매지(朴每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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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로왕을 시조로 하고, 김석손·김명기·김극관 등을 입향조로 하는 경상남도 하동군의 세거 성씨. 우리나라 성씨 가운데 김해 김씨의 인구가 가장 많다. 김해 김씨는 분파도 매우 많아 특정 지역의 입향조를 일괄적으로 정리하는 것이 쉽지 않다. 하동 지역의 김해 김씨는 김유신(金庾信)의 직계 종파 가운데 삼현파(三賢派)[김극일·김일손·김대유]와 사군파(四君派)가 대부분을 차지한다. 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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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하동군 진교면 고이리에 있는 김현주(金顯周) 부자의 효행을 기리는 비. 김해 김씨 후손으로 효행이 뛰어났던 귤은(橘隱) 김현주는, 생부 김성두(金星斗)의 명을 받아 숙부 김문두(金文斗)에게 입양되어, 양쪽 부모를 지성으로 받들어 섬겼다. 김현주는 생부 김성두가 귤을 좋아했기 때문에 뜰에 귤나무를 심어 아버지를 봉양하고, 아호를 ‘귤은’이라 했다. 김현주의 아들 김민배(金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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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하동군 고전면 대덕리 대덕에 있는 김해 김씨 동성 마을. 본디 큰덕골이라 하였다가 1914년 행정 구역 개편 때 한자로 표기하면서 ‘큰 대(大)’자와 ‘덕 덕(德)’자를 써서 대덕이라 하였다. 풍수지리상 마을 지세가 닭의 형국이라 큰닭골이라 하였는데 큰덕골로 음이 바뀌었다가 오늘날 대덕으로 변했다는 설도 있다. 조선 중기 사과(司果) 벼슬을 지냈던 김해 김씨 김익중(金益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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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하동군 적량면에 속하는 법정리. 상삼동(上三東)·중삼동(中三東)·하삼동(下三東) 등을 합쳐 공통 음절인 ‘동’을 따서 동리(東里)라 하였다. 마을이 적량면(赤良面) 동쪽에 있어 붙인 이름으로 여겨진다. 『호구총수(戶口總數)』에 삼동촌(三東村)이라는 명칭이 기록되어 있다. 1702년(숙종 28) 진주목(晉州牧)에서 하동군 적량면에 편입된 지역으로, 1914년 행정 구역 개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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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하동의 열녀. 본관은 진양(晉陽). 겸재(謙齋) 하홍도(河弘度)[1593~1666]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하진문(河晉文)이다. 남편은 박이한(朴而翰)으로, 본관은 함양(咸陽)이다. 박이한 처 진양 하씨는 시집간 지 한 달 만에 남편 박이한이 독사에 물려 죽자, 독사가 나타난 곳으로 가서 슬피 울며 이틀을 기다려 독사를 잡아 물어서 씹어 죽이고는 시신을 입관한 뒤에 목을 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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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하동군 횡천면 횡천리에 있는 개항기 진양 하씨의 열행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 하진문(河晉文)의 딸 진양 하씨(晉陽河氏)는 함양 박씨(咸陽朴氏) 박이한(朴而翰)에게 시집갔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혼인 초에 남편이 독사에 물려 세상을 떠났는데, 진양 하씨는 독사가 나타난 곳으로 가서 슬피 울며 이틀을 기다려 독사를 잡아 물어서 씹어 죽이곤 자결을 하였다. 고종 연간에 나라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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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하동 출신의 의병. 박홍지(朴弘之)는 1881년[혹은 1882년이라고도 한다] 지금의 경상남도 하동군 악양면 정서리에서 태어났다. 1907년(순종 1)은 헤이그 밀사 사건과 그에 따른 고종의 강제 퇴위, 정미7조약[일명 한일신협약]에 의한 한국의 통치권 약화, 한국군 강제 해산 등으로 각지에서 의병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박홍지는 1907년 지리산을 중심으로 하동, 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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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1919년 3월 1일을 기해 경상남도 하동군을 포함하여 전국에서 일어난 항일 독립 만세 운동. 제1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제국주의 열강들의 힘이 약화되는 한편 러시아에서는 소비에트 혁명이 성공하면서 식민지 약소민족에게 민족 해방에 대한 새로운 희망의 불씨를 지펴 주었다. 그리하여 전 세계 곳곳에서 민족 해방 운동의 열기가 고조되었다. 우리나라에서도 일제의 수탈에 반발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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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하동 출신의 의병. 손기혁(孫琪赫)은 1878년(고종 15) 4월 22일 지금의 경상남도 하동군 옥종면 원계리 199번지에서 태어났다. 손태옥(孫太玉) 또는 손태옥(孫泰玉)이라고도 부른다. 1907년(순종 1)은 헤이그 밀사 사건과 그에 따른 고종의 강제 퇴위, 정미7조약[일명 한일신협약]에 의한 한국의 통치권 약화, 한국군 강제 해산 등으로 각지에서 의병 운동이 활발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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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동 지역은 남해와 섬진강을 끼고 있어 해상 교통이 편리할 뿐 아니라 경상도와 전라도의 접경지대로 오랜 옛날부터 지리적 요충지로서 주목 받았다. 이 때문에 일찍부터 도로와 시장이 발달하고 물산이 풍부했던 반면에 침략을 받기도 쉬운 이중적 특징을 가지고 있어서, 고려 후기에는 왜구의 잦은 침략을, 조선 시대에는 임진왜란을 겪었다. 그러나 정유(鄭愈)나 정기룡(鄭起龍) 같은 이들에 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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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년에서 1910년 사이 조선의 국권 회복을 위해 경상남도 하동군을 포함한 조선 전역에서 일어난 실력 양성 운동. 1904년 한일 의정서와 한일 협약, 1905년의 을사조약으로 조선은 국권을 거의 상실하게 되었다. 이에 한편에서는 의병 투쟁이, 또 한편에서는 애국 계몽 운동이 일어나 국권 회복을 위해 노력하였다. 애국 계몽 운동은 1904년 보안회의 황무지 개척 반대 운동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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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2년경 면암 최익현이 경상남도 하동군 하동읍 화심리에 있는 여씨의 재실 양심재에서 읊은 한시. 「양심재염심자(養心齋拈心字)」는 최익현(崔益鉉)[1833~1906]의 문집 『면암집(勉庵集)』 권2에 수록되어 있다. 1989년 여강출판사에서 간행한 『면암최선생전서(勉菴崔先生全書)』 인책(人冊)의 문인 곽한소(郭漢紹)가 지은 「남유일기(南遊日記)」에 의하면, 최익현은 1902년(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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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하동 출신의 의병. 우수보(禹守甫)는 1879년(고종 16) 지금의 경상남도 하동군 악양면 봉대리 하평에서 태어났다. 우수보(禹首甫)라고도 썼다. 1907년(순종 1)은 헤이그 밀사 사건과 그에 따른 고종의 강제 퇴위, 정미7조약[일명 한일신협약]에 의한 한국의 통치권 약화, 한국군 강제 해산 등으로 각지에서 의병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우수보는 1907년 8월부터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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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하동군 양보면에 속하는 법정리. 1914년 행정 구역 개편으로 운산촌(雲山村), 지내촌(池內村), 상명석촌(上鳴石村), 진암촌(陣岩村)이 양보면 운암리로 통합·개편되었다. 이때 상명석촌은 수척(水尺)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높이 140m 정도의 성지봉[일명 굴뫼]이 장암리와 운암리 경계를 이루고, 와우산이 통정리와 박달리 경계를 이루며, 서남단으로는 고전면 명교리 성평과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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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하동군 악양면 축지리에 있는 윤보국(尹輔國)의 효행을 기리는 비. 개항기 고종 때의 일이었다. 병으로 위독한 아버지를 구하고자 아들 윤보국이 단지(斷指)하여 피를 흘려 아버지 입에 넣자, 옆에서 지켜보던 윤보국의 제수로, 홀로 살던 임씨가 또한 손가락을 잘라 피를 시아버지 입에 넣어 윤보국의 아버지를 소생시켰다. 이들을 두고, 사람들은 한 가문에 효자와 효부가 같이 태어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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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하동군 악양면 축지리에 있는 윤보국(尹輔國)의 효행을 기리는 비. 개항기 고종 때의 일이었다. 병으로 위독한 아버지를 구하고자 아들 윤보국이 단지(斷指)하여 피를 흘려 아버지 입에 넣자, 옆에서 지켜보던 윤보국의 제수로, 홀로 살던 임씨가 또한 손가락을 잘라 피를 시아버지 입에 넣어 윤보국의 아버지를 소생시켰다. 이들을 두고, 사람들은 한 가문에 효자와 효부가 같이 태어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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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하동군 옥종면 청룡리에 있는 개항기 때 정려각. 이번 처 절부려(李蕃妻節婦閭)는 이번(李蕃)의 처 장수 황씨(長水黃氏)의 절의를 기리는 정려각이다. 1593년(선조 26) 7월, 진주성(晉州城)을 함락한 왜군이 하동군 청암면 묵계리 쪽으로 쳐들어왔는데, 이때 왜적을 피해 숲 속에 몸을 숨기고 있던 장수 황씨는 왜적에게 잡히고 말았다. 왜적이 칼을 목에 대고 위협하자 장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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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하동군 하동읍에 있는 조선 후기 문신 이삼현(李參鉉)의 선정비. 조선 후기 고종 연간인 1865~1868년 경상도관찰사로 재임 중이던 이삼현이, 목화 농사 흉년으로 군포(軍布) 납부 문제 때문에 부민들이 곤경에 처하자, 이를 돈으로 대납할 수 있게 함으로써 백성들의 부담을 덜어주었다. 이를 고맙게 여긴 하동부민들이 1868년 1월 이삼현이 예문관제학에 제수되어 이임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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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후기 하동 지역에서 재직한 문신. 본관은 여주(驪州). 자는 자천(自天). 할아버지는 고려 후기의 이름난 문인인 이규보(李奎報)[1168~1241]이며, 아버지는 사재소감(司宰少監)을 지낸 이함(李涵)이다. 이익배(李益培)는 고려 후기 고종(高宗) 때 과거에 급제하여 하동감무(河東監務)로 벼슬을 시작하였으며, 임기를 마친 후 한림원(翰林院)에 뽑혀 들어갔다. 그 뒤 승진을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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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하동군 악양면에 속하는 법정리. 정동리는 정동마을에서 유래되었다. 취간정 동쪽에 자리 잡은 마을이므로 정동(亭東)이라 하였다. 1914년의 행정 구역 개편으로 정동동, 부계동(鳧溪洞)이 통합되어 악양면 정동리가 되었다. 악양분지 가운데로 악양천이 북에서 남으로 흐르고, 악양천 변에 정동과 부계가 터를 잡았다. 정동리는 악양면 중앙부에 자리 잡고 있다. 2011년 3월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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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하동군에 있는 조선 시대 충신·효자·열녀를 기리기 위해 세운 건축물. 정문(旌門)은 정려(旌閭)라고도 하며, 홍문(紅門)·홍살문이라고도 한다. 그 행실을 널리 알리고 표창하는 것을 정표(旌表), 그 일을 정려(旌閭)라고 했다. 충신·효자·열녀를 표창하여 그 집이나 마을 앞에 세운 건축물을 말한다. 대개 붉은 살을 두른 사방 한 칸 형식이나 문중 정려를 한 곳에 모아 여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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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후기 하동 출신의 문신. 본관은 하동(河東). 아버지는 고려 명종 때 형부상서를 지낸 정세유(鄭世裕)이다. 형은 정윤당(鄭允當)과 우복야를 지낸 정진(鄭稹)이며, 사위는 무인 집정이었던 최이(崔怡)이다. 아들은 참지정사를 지낸 정안(鄭晏)이다. 정숙첨(鄭淑瞻)은 벼슬이 여러 번 올라 추밀원지주사(樞密院知奏事)가 되고, 고종 때는 참지정사가 되었다. 거란의 금산왕자(金山王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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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하동군 금남면 덕천리에 있는 일제 강점기 정재권(鄭在權)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세운 정려각. 정재권[1796~1877]은 진양 정씨(晉陽鄭氏)로 행용양위부호군(行龍驤衛副護軍)이었다. 어려서부터 지극히 효성스러워 진귀한 음식을 얻으면 매번 반드시 집에 가지고 돌아가 어머니께 드렸다. 어머니가 병이 들어 비둘기 고기가 먹고 싶다고 하자, 정재권이 목욕재계하고 하늘에 기도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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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하동군 금남면 덕천리에 있는 일제 강점기 정재권(鄭在權)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세운 정려각. 정재권[1796~1877]은 진양 정씨(晉陽鄭氏)로 행용양위부호군(行龍驤衛副護軍)이었다. 어려서부터 지극히 효성스러워 진귀한 음식을 얻으면 매번 반드시 집에 가지고 돌아가 어머니께 드렸다. 어머니가 병이 들어 비둘기 고기가 먹고 싶다고 하자, 정재권이 목욕재계하고 하늘에 기도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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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하동 출신의 의병. 조기섭(趙奇攝)은 1881년(고종 18) 지금의 경상남도 하동군 악양면 신흥리 하신흥에서 태어났다. 1907년(순종 1)은 헤이그 밀사 사건과 그에 따른 고종의 강제 퇴위, 정미7조약[일명 한일신협약]에 의한 한국의 통치권 약화, 한국군 강제 해산 등으로 각지에서 의병 운동이 일어났다. 조기섭은 1907년 8월부터 하동 지역을 중심으로 박매지(朴每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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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하동 출신의 효자. 본관은 함흥. 완산부원군(完山府院君) 추수경(秋水鏡)의 9세손이다. 아버지는 추민중(秋敏中)이며, 어머니는 창원 황씨이다. 추성원(秋成元)은 순조와 고종 대의 효자이다. 13세 때 어머니가 병이 나자 지리산과 금오산 등에서 약초를 구해 드렸으나 소용이 없었다. 이를 지켜보던 이웃 노인이 효성에 감동하여, 속설에서 들은 말로 인육을 먹으면 병이 나을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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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하동군 양보면 운암리 관어재에 있는 조선 후기 김중원(金重元)의 유물. 퇴장암(退藏庵) 김중원[1680~1750]은 임진왜란 때 수문장으로서 진주성에서 순절하여 창렬사(彰烈祠)에 향사된 낭선재(浪仙齋) 김태백(金太白)의 후손이다. 1728년(영조 4년) 이인좌(李麟佐)의 난을 진압한 공으로 일등공신에 책록되었으나 관직에 나아가지는 않았다. 1891년(고종 28) 가선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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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하동군 화개면 덕은리에 있는 조선 전기의 정자. 악양정(岳陽亭)은 일두(一蠹) 정여창(鄭汝昌)[1450~1504]이 18년간 은거하면서 학문을 강론하던 곳이다. 정여창은 1490년(성종 21)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하고 세자시강원설서(世子侍講院說書), 안음현감(安陰縣監) 등을 지내다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에 연루되어 종성(鍾城)에 유배되었으며, 1504년(연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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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하동군 화개면 덕은리에 있는 조선 전기의 정자. 악양정(岳陽亭)은 일두(一蠹) 정여창(鄭汝昌)[1450~1504]이 18년간 은거하면서 학문을 강론하던 곳이다. 정여창은 1490년(성종 21)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하고 세자시강원설서(世子侍講院說書), 안음현감(安陰縣監) 등을 지내다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에 연루되어 종성(鍾城)에 유배되었으며, 1504년(연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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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하동군 적량면 동리에 있는 고려 후기 고종~충선왕 대의 분묘. 하동 동리 방형분(河東東里方形墳) 3기는 할석으로 된 3단 석축의 방형 분묘로서 하동 정씨(河東鄭氏) 정국룡(鄭國龍)과 두 아들 정지연(鄭芝衍), 정난연(鄭蘭衍) 형제의 묘라고 전해지고 있다. 밀직공(密直公) 정국룡은 고려 고종 대에 광정대부밀직부사(匡靖大夫密直副使)에 증직된 인물이다. 정국룡의 큰아들 첨의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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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언신을 시조로 하고 박윤을 입향조로 하는 경상남도 하동군의 세거 성씨. 함양 박씨는 신라 말기 경명왕(景明王)[재위 917~924]의 셋째 아들 박언신(朴彦信)[속함대군]을 시조, 박선(朴善)을 중시조로 하는 성씨이다. 하동 지역의 함양 박씨는 중시조 박선의 19세손인 박윤(朴綸)이 함양에서 하동으로 이거(移居)한 이후 후손들이 세거하였다. 신라의 개국시조 박혁거세왕을 원조로 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