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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3400328
한자 河東北芳里高城山城
영어의미역 Goseongsanseong Fortress in Bukbang-ri, Hadong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유적(일반)
지역 경상남도 하동군 옥종면 북방리 산13-1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박용국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문화재 지정 일시 1994년 7월 4일연표보기
현 소재지 경상남도 하동군 옥종면 북방리 산13-1 지도보기
성격 성곽
양식 테뫼식 산성
크기(높이, 길이, 둘레) 2.2m[높이]|12m[남북 길이]|7.7m[동서 길이]|600m[둘레]
면적 125,564㎡[11필]
소유자 하동군
관리자 하동군
문화재 지정 번호 경상남도 기념물 제142호

[정의]

경상남도 하동군 옥종면 북방리에 있는 조선 시대 성곽.

[개설]

하동 북방리 고성산성(河東北芳里高城山城)은 1894년(고종 31)에 일어난 동학 농민 운동의 항일 전적지로 알려진 곳인데, 지금도 고성산[일명 고승당산, 186m] 정상 부근에는 당시 지휘자들이 군사 회의를 개최한 듯한 의자 및 탁자 모양의 돌이 남아 전한다. 당시 진주 지역의 동학 농민군 5,000여 명은 하동 북방리 고성산성에 석루를 쌓아, 신식 무기로써 무장한 일본군을 상대로 처절한 전투를 벌여 많은 희생자를 내고 패퇴하였다. 지금도 1894년 동학 농민군이 일본군을 상대로 한 전투를 보여 주는 당시의 유물인 숟가락과 그릇 조각 등이 종종 출토된다고 한다.

[건립 경위]

하동 북방리 고성산성의 축성 연대를 확실하게 알 수 있는 기록이 없다. 성이 사근도와 소촌도의 역로를 이어 주는 요새에 위치하는 것으로 볼 때 적의 침략을 늦추거나 방어하기 위해서 축성한 것으로 보인다. 처음 축조 시기는 18세기 이전으로 추정되며, 1770년(영조 46)대까지 성이 잘 보존되고 있었다고 한다. 18세기 무렵 이미 산성으로서 기능을 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이후 동학 농민군에 의해서 수축(修築)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위치]

동학 농민 위령탑(東學運動慰靈塔)에서 북서쪽으로 20m 떨어진 지점인 고성산 정상부에 위치한다. 서쪽으로는 고성산성에서 2.7㎞쯤에 위치하는 정수역을 거쳐 황치를 넘어 남쪽으로 방향을 틀어 마전역[현 하동군 양보면 감당리 신전마을]을 지나 고읍(古邑)[河東邑城]· 남해에 이를 수 있었다. 북쪽으로는 소남역을 통해서 산음현이나 삼가현으로 나아갈 수 있으며, 동으로 완사역과 평거역을 통해서 진주 읍치로 갈 수 있는 역로에 위치한다. 동북쪽으로 덕천강을 끼고 있고, 동남쪽 일부를 제외하면 주변 2㎞ 이상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지세(地勢)에 자리하고 있다.

[형태]

고성산 정상 부분을 테를 두른 것처럼 쌓은 테뫼식 산성이다. 고성산의 능선 곳곳에 암벽이 형성되어 있는데, 이 자연 암벽들을 연결하여 성을 쌓았음을 보여 주는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면적은 12만 5564㎡[11필]이며, 성벽이 약 600m 정도 남아 있다. 성곽은 남북 길이 12m, 동서 길이 7.7m, 높이 2.2m 정도 확인 가능하다.

[현황]

2011년 현재 하동 북방리 고성산성의 소유자 및 관리자는 하동군이다. 1994년 7월 4일 경상남도 기념물 제142호로 지정되었다. 2006년 12월 20일 하동군 옥종면 지역 주민 46명이 옥종면사무소에서, 동학 혁명군의 뜻을 기리고 문화 유적지로서 하동 북방리 고성산성의 보전과 개발을 위한 ‘고승당산 항일동학농민군전적지 보존위원회’[위원장 하계문]를 발족하였다.

하동 북방리 고성산성의 동쪽 아래 마을인 하동군 옥종면 북방리의 신촌에는 하동 북방리 수정당(河東北芳里守正堂)이 있고, 서쪽에는 하동 대곡리 조지서 묘비(河東大谷里趙之瑞墓碑)하동 대곡리 오천 정씨 정려각(河東大谷里烏川鄭氏旌閭閣), 그리고 옥산서원(玉山書院)이 있다. 북쪽으로 덕천강을 가로지르는 창촌교(옛 무실나루터)를 건너면 1862년(철종 13) 진주 농민 항쟁의 역사 현장으로서 수곡도회가 열렸던 옛 수곡장터(무실장터)가 자리한다.

[의의와 평가]

하동 북방리 고성산성은 1894년 일본 제국주의 세력의 부당한 내정 간섭에 항거하여 봉기한 서부 경상남도 일원의 농민군 5천여 명이 일본군과 맞서 싸웠던 항일 전투의 현장으로서 역사적 의의가 크다고 하겠다.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