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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동청년동맹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3400396
한자 河東靑年同盟
영어의미역 Hadong Youth Alliance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지역 경상남도 하동군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추경화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설립 시기/일시 1927년 8월 20일연표보기
성격 청년 단체
설립자 김원원|김계영|우용현|문태규

[정의]

일제 강점기 경상남도 하동 지역에 있었던 청년 단체 연합체.

[설립 목적]

하동청년동맹은 풍속 교정, 덕성 함양, 문자 보급, 지식 계발, 애국 계몽 등을 위해 설립되었다.

[변천]

1927년 8월 20일 창설되었다. 『동아일보』 1927년 8월 24일자에 의하면 하동청년동맹이 8월 20일 발회식을 거행하였고 대표 임원들은 김익원, 김계영, 우용현, 문태규라고 밝혔다. 회원들은 대부분 하동 지역의 유지급 청년들이었는데, 이들은 거의 하동청년회 회원들이기도 하였다. 하동청년회하동청년동맹보다 먼저 조직되었으며 하동청년동맹 설립 뒤에도 공식적으로 해산되지는 않았다. 하동청년연맹도 있었던 것 같으나 국부적 연합체에 불과했고 활동 기록이 없으며 곧 하동청년동맹에 흡수되었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하동청년동맹은 우선 사회 계몽과 관련하여 많은 일을 하였다. 『뭇소리』라는 청년동맹 기관지를 발간해 널리 일반에게도 활동 내용을 알려 여론을 환기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국제청년데이 기념으로 기념식을 거행해 변방의 작은 단체가 아님을 표출하기도 하였다. 애국 강연을 통해 애국심을 고취하였으며, 야학 운영과 문맹퇴치에 주력하였다. 테니스 대회, 축구 대회 등을 개최하여 체육을 통한 심신이 건강한 삶을 강조하기도 하였다. 1927년 10월에 여성지부를 두고 여성들도 청년동맹 활동에 참여할 수 있도록 했으며 남녀가 함께 활동하는 모습을 보여 주기도 하였다. 학생 운동을 뒤에서 지도하고 도와주었으며, 1927년 11월 서화전시회를 개최하고 화개, 적량, 남면, 양보 지부 등을조직했다. 「청년하동」창간호를 발간했으나 일경에 압수되기도 하였다. 1929년 8월 항일애국강연을 실시하려다가 해산 명령을 받은 후 모든 활동이 중지되었다. 신간회근우회 활동을 지원하기도 하였다.

1927년 11월에는 학생들의 동맹 휴교를 조종하고 도와주었다는 혐의를 받았다. 또한 임원 이용사[일명 이경재]가 야학교 학생들에게 조선인의 우수성과 일제의 침략성을 훈육하다가 일경에 발각·체포되어 부산지방법원 진주지청에서 징역 6월형을 언도 받았다. 이에 하동청년동맹 회원들이 일제히 반발하였고 일제가 하동청년동맹의 모임 자체를 완전히 중단시키고 엄중 경고하고 감시하게 되면서 하동청년동맹은 해체되기에 이르렀다.

[의의와 평가]

현재 하동청년동맹이 창립된 곳은 광복 후 공회당으로 사용되었고, 하동문화원 건물로 사용되다가 지금은 사회 단체가 입주하면서 내부 수리를 거치면서 원형을 잃어버렸다. 그러나 하동청년동맹이 남긴 애국 애족 정신까지 사라졌다 할 수는 없다. 일제 강점기 식민 지배를 청산하기 위한 대중 운동의 성장과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보다 적극적으로 투쟁하고자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경의 탄압과 감시로 일정 정도 한계를 가질 수 밖에 없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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