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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3400585
한자 景忠祠
영어의미역 Gyeongchungsa Shrine
분야 종교/유교,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건물
지역 경상남도 하동군 금남면 중평리 821-1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김성채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건립 시기/일시 1932년연표보기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66년연표보기
관련 사항 시기/일시 1992년연표보기
개축|증축 시기/일시 2005년연표보기
현 소재지 경상남도 하동군 금남면 중평리 821-1 지도보기
성격 사당
양식 맞배지붕
정면 칸수 3칸
측면 칸수 2칸
소유자 진양 정씨 문중
관리자 정한효

[정의]

경상남도 하동군 금남면 중평리에 있는 일제 강점기 정기룡(鄭起龍) 장군의 사당.

[개설]

경충사(景忠祠)충의공 정기룡[1562~1622]의 영정과 위패를 봉안한 사당이다. 경충사가 위치한 하동군 금남면 중평리는 임진왜란 때 수많은 전공을 세운 정기룡이 나고 자란 곳이다. 정기룡은 60여 차례나 왜군을 물리친 명장으로, “바다에는 충무공 이순신, 육지에는 충의공 정기룡”이라 일컬어질 정도로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원래의 이름은 경운(景雲)이었는데, 선조가 ‘일어난 용’과 같다 하여 기룡(起龍)이란 이름을 내렸다.

1592년(선조 25)에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거창ㆍ금산 등에서 왜적을 무찌른 공로로 상주판관(尙州判官)이 되었고, 다시 승전을 거둬 상주목사(尙州牧使) 겸 감사군대장(敢死軍大將)이 되었다.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 때에는 금오산성(金鰲山城)을 지키고 경상북도 고령에서 대승을 거둬 경상우도병마절도사로 승진하였으며, 다시 60여 회의 전투에서 왜적을 물리쳤다. 경주, 울산 등을 되찾아 삼도군통제사 겸 경상우도절도사에 올랐다가, 통영의 진중에서 순직하였다.

[위치]

하동군 금남면 중평리 821-1번지 하동군 청소년수련원 옆에 위치한다.

[변천]

1928년에 선비들이 정기룡을 흠모하는 모충계(慕忠契)를 만들었다. 1932년 후손들과 함께 정기룡이 소년 시절에 다니던 서당 자리에 경충사를 짓고, 내삼문(內三門)과 외삼문(外三門)을 세워 위업을 기렸다. 민족의식의 확산을 우려한 일제에 의해 사당이 철거되고 유품이 압수되는 등의 고난도 겪었으나, 1966년부터 다시 정기룡의 위패를 봉안하였다. 1992년부터 경충사 진입로를 비롯한 사당 일대를 정비하였으며, 2005년에 새롭게 재건하였다.

[형태]

경충사정기룡 장군 유허지(鄭起龍將軍遺墟址) 내에 있는 내삼문 안쪽으로 돌담장으로 구획되어 있어 별도의 묘우 영역을 가진다.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맞배지붕집이며, 모로단청을 하였다. 경충사 내에는 정기룡의 위패와 영정이 봉안되어 있다. 위패에는 ‘보국 숭록대부 충의정공(輔國崇祿大夫忠毅鄭公)’이라 새겨져 있으며, 교의에 안치되어 있다. 영정은 반신상으로 위패 뒷벽에 걸려 있다. 위패와 영정 앞으로 제상이 마련되어 있다.

[현황]

지방 유림과 후손들은 매년 음력 2월 28일 정기룡의 탄생일을 맞아 생신제를 지내고, 음력 3월 15일에 향사(享祀)를 지내 왔으나, 2011년 현재는 2월 28일에 향사를 지내고 있다. 진양 정씨(晉陽鄭氏) 문중 소유로 관리자는 정한효로 되어 있다. 진양 정씨 문중을 비롯한 향내 유림과 하동군이 협력하여 관리하고 있다.

[의의와 평가]

경충사는 1928년 일제 강점기에 지방 유림들의 발의로 창건된 사당으로, 사당이 철거되고 유품이 압수되는 등의 고난을 겪는 과정 속에서도 굳건히 지켜 왔다. 임진왜란 때 왜구를 물리치는 데 큰 공을 세운 정기룡의 위업과 함께, 경충사를 건립한 유림들의 충효 정신과 애국 의식을 후손들에게 물려줄 수 있는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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