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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통을 꿈꾸는 육지 속의 섬, 영신마을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3401936
한자 疏通-陸地-永信-
영어의미역 Youngsin Village, the Island Surrounded by Mainland
분야 지리/인문 지리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경상남도 하동군 적량면 동산리 영신마을지도보기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성채

[개설]

구재봉 줄기는 공드림재 정상에서 잠시 쉬었다가 두 갈래로 나뉘어, 한 줄기는 하동군 적량면 동산리 상동산마을 쪽으로, 또 한 줄기는 관리 쪽으로 뻗어 간다. 하동군 적량면 동산리 영신마을은 바로 그 사이에 형성된 자연 마을이다. 북쪽으로는 하동군 적량면 동리 명천마을과, 동쪽으로는 횡천면 남산리 남산마을[하남, 상남] 및 동산리 하동산마을과 접해 있다. 서쪽으로는 하동군 적량면 관리 죽치마을과 산등성이 하나를 사이에 두고 접해 있다. 영신마을은 동산이골[東山里谷] 또는 돈산리골[遯山里谷]이라 불리는 골짜기에 형성된 마을로, 폭이 좁고 입구가 넓게 펼쳐진 삿갓형이다. 넓은 된골들과 접하며, 마을 앞으로 국도 2호선이 통과하여 교통이 편리하다.

영신마을은 전국 방방곡곡에서 찾아온 소외 계층[한센병 음성 환자]이 산을 개간하고 길을 내며 손수 집을 지어 집단 마을을 조성하여 정착한 곳이다. 처음에는 대다수의 주민이 마을 내에 축산 조합을 만들어 축산업에 종사하였다. 현재는 대부분의 주민이 60~70세 노인들로, 16가구만이 축산업에 종사하고 있다.

[세상에서 버림받은 자들의 희망 만들기]

한센병 환자들이 처음부터 이곳에 정착한 것은 아니다. 처음 그들이 정착한 곳은 하동군 적량면 동산리 298번지 ‘구영신원’이라는 곳으로, 횡천면 학리 마치마을에서 바라보이는 맞은편 산자락이었다. 그때가 1943년 정도로, 4세대 8명이 모여 움막을 치고 문전걸식을 하며 생활하였다. 그렇게 한 사람, 두 사람 모여들다가 20~30명 정도가 되자, 당시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에서 시무하던 최성훈 목사가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 한국연합회에서 구호물자를 지원 받을 수 있게 해 주었다. 또한 당시 부산에 살던 산주인 신창열이 한센병 환자들을 안타깝게 생각하여 부지에서 마음 놓고 살 수 있도록 허락해 주었다. 그것이 인연이 되어 정착민들은 신창열을 (재)하동 영신원의 초대 원장으로 추대했고, 1943년 5월 6일을 농원 설립일로 정하였다.

이후 1956년 5월 6일 정착민들은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 한국연합회에서 받은 물자를 팔아서 모은 돈으로 하동군 적량면 동산리 102번지를 매입했다. 그러나 당시 적량면 주민들의 강력한 입주 반대가 있었다고 한다. 정착민들은 당시의 상황에 대해 식은땀을 닦아 가며 이야기를 했다. 병든 몸으로 일반인을 상대하기가 어려웠으나, 정말 긴장한 상태에서 쇠스랑과 괭이, 낫 등을 들고 밤새 매입한 땅을 지켰다고 한다. 당시 목사인지 신부인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일반 주민을 설득하고 중재했으며, 결국 토지 소유자들의 묵시적인 협조로 주택 61동을 짓고 정착촌을 형성하고 산을 개간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 후 1960년대 신창열 원장이 서독에 사는 아들에게 연락하여, 서독구라협회로부터 도움을 받아 3층 건물의 영신원 보육원[구 한독의원] 건물을 신축하였다. 그리고 1961년 보건복지부장관으로부터 재단법인으로 인가를 받았으며, 1962년 마을 입구에 표지석을 설치하였다. 현재 그 당시에 세운 마을 표지석은 마을 입구 하천을 정비하고 도로 포장 공사 등을 하면서 영신분교에서 마을로 향하는 우측편의 신창열 묘역 앞으로 옮겨 놓았다. 1965년 8월 정착민들은 초대 원장인 신창열의 공로를 널리 알리고자 공적비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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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후반 정착민들은 주택의 지붕을 개량하기 위해 마을에 제와 공장을 만들어서 기와를 구웠다. 그리고 불편한 몸을 이끌고 손수 지붕을 개량했다. 1971년에는 천주교 하동교회 영신원공소에서 시무하는 범덕례 프란치스코 신부의 도움으로 마을에 전기가 들어와 각 가정과 골목이 환하게 되었다. 주민들은 지금도 그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잊지 못한다고 말한다. 또한 1960~1970년대 정부의 복지 정책과 민간 차원의 지원에 힘입어 마을은 더욱 발전하게 되었다.

영신마을은 처음에 인근 하동산마을에 속하는 한 개 반이었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사실상 한 마을로서 인식되었다. 그리하여 1990년부터 비공식적이지만 이장 회의에 (재)하동 영신원 대표가 참석하도록 적량면장이 허용하였다. 그 후 주민들은 하동군에 영신마을을 자연 마을로 승격해 줄 것을 수차례 건의했고, 1990년 5월 18일 「하동군 조례」 1151호로 승인 받아 자연 마을로 승격되었다. 이에 영신마을 주민들은 동산리에 속하는 상동산, 하동산, 두전, 계동과 함께 자연 마을 주민의 권리와 의무를 수행하고 있다.

그런데 선거 때마다 문제가 생겼다. 영신마을은 매 선거 때마다 적량면의 제4투표구로서 단일 투표구로 지정되어 있었다. 외부인과 소통을 원했던 주민들은 단독 투표구는 비밀 투표에 위배되므로 제1투표구에 합병시켜 줄 것을 수차 건의하였다. 결국 2000년 4월 13일 총선부터 1투표구에 합병되어 지역민과의 소통 및 투표의 의미를 되살릴 수 있게 되었다.

[한독의원 개원과 세상과의 소통]

한독의원은 1960년대 (재)하동 영신원 신창열 초대 원장의 도움으로 서독구라협회로부터 지원받아 지어진 영신원 보육원을 리모델링하여 들어섰다. 원래 영신원 보육원은 정착촌에 거주하는 어린이를 보호하기 위한 시설이었다. 마을 주민들이 몸이 불편해서 어린이들을 제대로 키울 수 없었기 때문이다. 또한 감염되지 않은 어린이[미감아]를 보호하는 목적 외에도 한센병 환자들을 돌보기 위한 시설이기도 했다. 한독의원 건물 외벽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적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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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명기 내용을 통해 확실하게 한독의원이 서독구라협회의 원조를 받았으며, 1964년에 건립되었다는 상황을 파악할 수 있다. 또한 2009년 한독의원 2층을 ‘희망 작은도서관’으로 리모델링하는 과정에서 용마루 아래 종도리에서 ‘용 서기일구육사년 시월 삼십일 오후일시 상량 귀(龍 西紀壹九六四年拾月參拾日午后壹時 上樑 龜)’을 확인하여 상량이 1964년 10월 30일 오후 1시에 이뤄졌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1975년 영신원 보육원에 한센병 환자들을 위한 한독의원을 개원한 사람은 김우홍 목사였다. 당시 하동 지역에는 중앙의원이 있긴 했으나 한센병 환자들이 일반 병원을 출입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러나 한독의원이 문을 연 뒤에는 영신마을 사람들뿐만 아니라, 주변 지역 사람들까지 찾아왔는데, 일반 병원에서 치료하지 못하던 병도 한독의원에서는 쉽게 나았을 정도로 하동 지역 사회의 의료 복지에 큰 공헌을 하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한독의원은 1978년 사정에 의하여 폐업하게 되었다.

이후 제2차 한독의원이 개원하게 되는데, 이는 처음 서독구라협회의 지원을 받아 건립되었기 때문에 본래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서독구라협회 한국지부의 대표를 맡은 사람은 ‘엠마 프라이싱거’였다. 그녀는 대구에서 피부과 의사로 활동하고 있었는데, 서독구라협회에서 원조 사항을 알려 오자 그 현황을 파악하기 위해 영신마을을 여러 차례 방문하였다.

그리하여 1981년 서독구라협회 한국지부와 (재)하동 영신원은 1981년 4월 6일 인증서를 작성하고 구라 사업을 위해 한독의원[피부과]을 재개원하였다. 인증서 내용을 보면, 서독구라협회 한국지부에서 30년간 구라 사업을 위해 재단법인 하동 영신원의 대지 5필지[1583.47㎡]와 보육원 2동을 사용키로 약정을 맺었다. 당시 재단 이사장이었던 김상원과 주민 대표 최봉민, 엄기선, 고삼용, 정기판, 강복구, 김균신, 김종래, 유재룡, 손장현이 이름을 쓰고 도장을 찍었다.

한독의원이 다시 문을 열자 근거리의 도시뿐 아니라 원거리의 도시에서도 피부과 진료를 받기 위해 많은 사람이 한독의원을 찾았다. 외부인이 한독의원을 많이 찾으면서 정착민과 일반 주민의 거리감이 좀 더 가까워질 수 있었다. 그러나 당시만 하더라도 한센병에 대한 잘못된 인식으로 지역민들은 정착민을 곱지 못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당초 계획된 30년간의 구라 사업을 펼치고자 했던 한독의원은 경영난으로 1994년 10월 18일 약정서 해지 통부를 발송한 후 폐업을 하고, 건물과 대지 등은 (재)하동 영신원에 환원시켰다.

[신앙생활로 희망을 만들어 가는 사람들]

영신마을 사람들은 대부분 종교 생활을 한다. 자신들의 애환의 삶을 신앙생활로 이겨 내고 있는 것이다. 영신마을 사람들은 정착 당시 가족들과 이별하고, 오히려 가족들의 사회생활에 방해될까 싶어 절제되고 단절된 생활을 해 왔다. 생존을 확인할 수 없는 북한의 이산가족보다 살아 있으면서 생존을 확인할 수 없는 더 가슴 아픈 삶을 살고 있는 게 한센병 환자들의 정착촌 생활이다. 외부와 단절된 생활, 일반인과 소통할 수 없었던 정착민들의 아픈 마음을 다독여 주고 희망을 품고 살 수 있도록 이끌었던 것이 신앙이었다.

마을 사람들은 대부분 개신교와 천주교 신자들이다. 마을에 처음 들어온 종교는 기독교 계통의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였다. 2011년 1월 현재 교인은 12명이다. 마을 사람들이 정착 과정에서 가장 많이 신앙생활을 했던 종파로서, 1950년대 최성훈 목사가 부임하면서 마을에 구호물자가 지원되는 계기가 되었다.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가 정착할 당시 교인들의 대표는 강위찬 장로였다.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의 보금자리는 1956년 7월에 건립되었다. 부지 면적은 3,122㎡이며, 건축 면적은 114㎡이다.

기독교의 장로교는 하동동산교회가 중심이다. 2011년 1월 현재 장로교인은 33명이다. 마을에 장로교가 전파된 것은 1960년이다. 당시에는 교회 건물도 없었으며, 목사도 파견되지 못해서 김삼표 장로를 중심으로 집에서 예배를 드리며 신앙생활을 시작하였다. 장로교의 보금자리인 하동동산교회는 1962년 12월에 건립되었다. 건물의 토지 면적은 576㎡이며, 건물 면적은 139㎡이다.

천주교는 천주교 마산교구 하동성당 적량공소이다. 원래는 천주교 하동교회 영신원공소라고 불렸다. 2011년 1월 현재 교인은 67명으로 마을에서 가장 많다. 천주교는 1961년도에 마을에 전파되었다. 당시에는 교인들의 보금자리가 없었으며, 교인 대표는 박대규였다. 1964년 9월 마을에 공소가 설립되었다. 그 해 10월 공소를 위한 건물 한 채를 매입하였고, 1965년 3월에 그동안 예비한 7명을 영세시켰다. 서독구라협회의 원조에 힘입어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에 다니던 21세대 48명의 신자가 개종을 하여 천주교 신자가 되었다. 1967년 이웃 하동본당의 관할 공소로 지정받고 보금자리를 신축하여 1968년에 준공하였다. 1983년 가톨릭나사업협회의 도움을 받아 공소 건물과 사택 1동을 신축하여 1985년 12월 건립하고, 구 건물은 강당으로 이용하고 있다. 부지 면적은 1012㎡이며, 건축 면적은 171㎡이다.

1969년 속칭 교파 싸움[천주교회 대 장로교회]이 시작되어 1년 동안 계속되었다고 한다. 당시의 정확한 상황을 알고 있는 사람은 몇 명 되지 않는다고 하는데, 그들 중 누구도 왜 교파 싸움이 일어났는지 자세하게 이야기해 주지 않았다. 마을 주민들은 과거에는 관심이 없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자신들의 존재를 드러내지 않으려고 하는 정착민들의 입장에서는 현재가 더 중요하게 생각될 수 있다. 지금 75세대 133명의 영신마을 주민들은 서로 화해하고, 한 가족 같은 분위기로 서로 의지하며 돕고 살아가고 있다.

[마을의 살림살이, (재)하동 영신원 설립과 발자취]

(재)하동 영신원은 1961년 보건복지부장관으로부터 재단법인으로 인가를 받았다. 재단법인으로 설립 당시 등록된 기본 재산은 논이 2만 1,898평[7만 2,390.08㎡], 밭이 158평[522.31㎡], 대지 253평[836.36㎡], 임야가 18만 5,664평[61만 3,765.29㎡]이며, 개인 건물이 670.5평[2,216.53㎡]이었다. 마을 내 논이 191만㎡, 밭이 10만 4,000㎡, 임야가 113만 5,000㎡, 대지가 3만 5,000㎡, 기타 잡종지가 9만 4,000㎡로 다른 마을보다 넓은 편이 아니다.

현재 영신마을이 위치한 곳은 1957년까지 3~4가구의 일반인이 거주하고 있었다. 그러나 (재)하동 영신원이 창립되면서 이들은 마을을 떠났다. 마을 주민들은 (재)하동 영신원 창립 이후 재단으로부터 토지를 임대받아 임야에는 밤나무를 심고, 토지에는 농작물을 심는데, 한때 밤나무에서 많은 소득을 올린 적도 있다. 아직도 마을 내 토지는 재단법인의 소유로 되어 있고, 마을의 운영은 이사회에서 이끌어 나가고 있다. 마을의 공동 재산은 마을 공동 창고 1동과 마을 회관 1동, 2011년 현재 영신축산조합사무실[1층]과 희망 작은도서관[2층]으로 사용되는 구 한독의원 건물 1동이다.

주민들은 밤나무 소득이 줄어들면서 축산업에 종사하기 시작했으며, 점차 참여 농가가 늘어났다. 1990년대까지 토지는 있으나 농사를 짓지 않는 땅에 축사를 지어 돼지와 양계를 주업으로 했다. 마을에 축산업이 확대되면서 오폐수가 많이 발생하자 인근 주민들로부터 지탄을 받기도 했다. 그리하여 1994년 1차 오폐수 처리 시설, 1999년 12월 28일 제2차 오폐수 처리 시설이 준공되어 2000년 3월 가동됨으로써 많이 개선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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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신마을 인구는 2011년 1월 기준으로 75세대에 남자 57명, 여성 76명으로 총 133명이 살고 있다. 평균 연령대는 66세로 80%가 기초 생활 수급자이다. 마을의 주택 현황은 79동에 5,520.66㎡[1,670평]이며, 축사는 144동에 2만 1,074.38㎡[6,375평]이다. 축사가 주택의 약 4배에 해당할 정도로 주 수입원이 축산업임을 알 수 있다. 창고는 45동에 7,791.74㎡[2,357평]이다.

축산업에 종사하는 가구는 16농가로, 양돈이 6농가 5,000두, 양계 6농가 4만 수, 한우가 4농가로 90두이다. 양돈이 일찍부터 정착되었으며, 다음으로 양계, 한우 순으로 들어왔다. 마을 사람들은 농토가 적어 야산을 개간하였으며, 두릅과 고사리를 재배해 중요한 수입원으로 삼고 있다. 하동의 다른 지역에 비해서 양지바른 쪽으로 일찍부터 두릅을 생산하고 있는데, 다른 지역보다 굵어서 고정적으로 상인이 내왕하며 사가고 있다.

(재)하동 영신원의 초대 이사장은 신창열로, 일제 강점기 마산시장과 함양군수, 남해군수를 역임하였다. 이후 1966년 12월 13일에 정관 일부를 변경하고, 1975년 5월 1일 임원 취임 승인을 얻어 제2대 이사장에 김상원이 취임하였다. 1976년 4월 23일 이사회의 승인을 얻어 이사를 교체했으며, 2000년 8월 31일 이사를 교체하고 이명석이 제3대 재단 이사장에 취임하였다. 2005년 8월부터 제4대 재단 이사장에는 하유시가 취임하여 현재까지 맡아 오고 있다. (재)하동 영신원의 이사장은 마을 주민이 아닌 외부인으로 선임하고 있으며, 이사진은 임기가 2년이고 연임이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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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센인의 빛이 된 희망 작은도서관]

희망 작은도서관은 2009년 문화체육관광부 작은도서관 조성 지원 사업에 선정되어 구 한독의원 건물 2층을 리모델링하여 만들어졌다. 한독의원 건물은 서독구라협회의 지원을 받아 보육원으로 처음 건립된 건물이다. 또 한독의원이 개원되어서도 지역민을 위한 역할을 해 왔다. 따라서 희망 작은도서관 역시 지역민의 문화 공간으로 조성됨으로써 새로운 생명을 부여하고자 했던 것이다.

희망 작은도서관 조성은 (주)명진종합건설이 공사를 맡았으며, 설계는 세진건축사무소에서 하였다. 또한 경상남도 문화재위원의 자문을 받았다. 공사는 순조롭게 진행되어 그 해 12월에 완료되었다. 희망 작은도서관은 어린이들이 쉽게 이용하는 공간인 어린이 자료실과 성인이 이용하는 일반 자료실로 구분되며, 다양한 프로그램이 진행될 수 있도록 열람실을 넓게 확보했다. 편안한 분위기의 공간을 디자인하다 보니 생각보다 비용이 많이 소요되었다고 한다. 진주문고 사장이 어린이들이 볼 수 있는 도서를 400권 정도 기증해 줬고, 지역민들도 도서와 컴퓨터 등을 기증해 줬다. 하동도서관에서도 체계적인 도서 관리 및 정리에 참여해 줬다. 희망 작은도서관은 정부의 지원과 지역민과 정착민이 함께 참여하여 조성한 셈이다.

희망 작은도서관의 개관식은 2010년 3월 18일 지역민과 공무원, 공사 관계자, 한센인을 대표하는 (사)한빛복지협회 관계자, 소록도국립병원 관계자 등이 참석한 가운데 개최되었다. 전국 한센인 정착촌 중에서 처음 만들어진 도서관이기도 한 희망 작은도서관은, 지역의 다문화 가정과 노인, 학생 들이 자유롭게 이용하고 있다. 특히 다문화 가정의 아이들이 희망 작은도서관에 자주 들러 책도 읽고 자유로이 책을 빌려 가고 있다. 개관식에 참석한 (사)한빛복지협회 관계자가 이후 경기도지사와 면담을 하여 경기도 내 한센인 정착촌에 작은 도서관이 생기도록 했다는 이야기도 들린다.

도서관에서는 노인들이 중심이 되어 한글 교실이 운영되고 있고, 학생들을 중심으로 주말이면 독서 교실도 운영된다. 또한, 월요일과 목요일 저녁 7시가 되면 지역의 음악인들이 기타 교실을 운영하고 있다. 희망 작은도서관은 하동도서관과 연계한 ‘순회 사서 지원 사업’에 선정되어 2011년 5월 현재 1주일에 한 번 순회 사서가 도서관에 와서 도움을 주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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