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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3400591
한자 雲岩影堂
영어의미역 Unamyeongdang Shrine
분야 종교/유교,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건물
지역 경상남도 하동군 양보면 운암리 912-1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김성채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건립 시기/일시 1924년연표보기
개축|증축 시기/일시 1958년연표보기
개축|증축 시기/일시 1994년연표보기
개축|증축 시기/일시 2003년연표보기
개축|증축 시기/일시 2005년연표보기
개축|증축 시기/일시 2010년연표보기
관련 사항 시기/일시 1924년 9월 9일연표보기
현 소재지 경상남도 하동군 양보면 운암리 921-1 지도보기
성격 사당
양식 맞배지붕
정면 칸수 3칸
측면 칸수 2칸
소유자 경주 최씨 문중
관리자 경주 최씨 문중

[정의]

경상남도 하동군 양보면 운암리에 있는 일제 강점기 최치원(崔致遠)을 기리는 사당.

[위치]

운암영당(雲岩影堂)하동군 양보면 운암리 중심 소재지에서 고전면 고하리 고하마을로 넘어가는 궁단재의 지내마을에 위치한다.

[변천]

고운(孤雲) 최치원[857~?]의 진영은 경주 서악서원(西岳書院)에 최초로 봉안된 뒤, 사본들이 태인의 무성서원(武城書院)과 하동의 옥천사(玉泉寺) 앞 학사대(學士臺)에 안치되어 있었다. 학사대가 퇴락하자 1775년(영조 51) 무렵 영정을 쌍계사(雙磎寺)에서 거두어 봉래각에 두었다. 1825년(순조 25) 지역 유림들이 하동군 화개면 덕은리 영당마을금천사(琴川祠)를 짓고 영정을 봉안하였다. 그러나 1868년(고종 5)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금천사가 훼철되면서 영정은 하동향교(河東鄕校)에 임시로 안치되었다.

1901년(고종 38) 10월 후손과 사림이 힘을 모아 면암(勉庵) 최익현(崔益鉉)[1833~1906]의 지도하에 횡천영당(橫川影堂) 건립에 착수하여 1902년(고종 39) 4월에 완공하였다. 면암 최익현이 영정 봉안 행사에 참석하였으며, 1903년(고종 40) 봄 「횡천영당 영건기(橫川影堂營建記)」를 찬하였다. 그 후 횡천영당을 여러 차례 보수하고 관리하였으나, 관리상에 어려움이 많아 1924년 하동군 양보면 운암리운암영당(雲岩影堂)을 중건하고 영정을 이봉하였다.

1924년 9월 9일 영당의 사우와 신문, 강당 및 동서재사, 문루(門樓)를 갖추었다. 1958년 운암영당의 강당인 중화당(中和堂)을 중수하였으며, 1994년 하동군의 지원으로 동재(東齋)를 중수하였다. 2003년 태풍 피해를 입어 서재(西齋)를 새롭게 지었으며, 2005년 폭설로 동재를 보수하였다. 2010년에는 중화당을 해체 보수하였다.

[형태]

운암영당은 서원의 전학후묘(前學後廟)의 배치 구조를 보인다. 문창선생영당(文昌先生影堂)과 강당을 중심으로 좌우에 동재와 서재를 배치하고, 앞쪽으로 출입문을 두었다. 운암영당은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영당으로 출입하는 협문은 일반적인 사당의 내삼문(內三門)과 다르게 일각문(一角門)에 사찰의 일주문 형식을 갖춘 협문 형식이며, 다포식에 팔작지붕으로 되어 있다. 모로단청으로 되어 있으며, 영당의 내부에는 별도의 감실을 두어 중앙에 「운암 영당 고운 선생 영정(雲岩影堂孤雲先生影幀)」이, 동쪽 벽에 「하동 운암리 최익현 영정(河東雲岩里崔益鉉影幀)」이 봉안되어 있다. 정면에는 ‘문창선생영당’ 현판이 걸려 있다.

강당에는 ‘운암강당(雲巖講堂)’이라고 써 있는 현판과 당호인 ‘중화당(中和堂)’ 현판이 걸려 있다. 강당은 정면 5칸, 측면 2칸 규모로, 중앙에 대청을 두었다. 대청 위에는 “구구 단기 사천이백구십일년무술 이월초삼일 오시 중수 상량 용용용(龜龜 檀紀四千二百九十一年戊戌二月初三日午時重修上樑 龍龍龍)”이라는 상량 기문이 있어 1958년에 중수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운암영당의 역사를 알 수 있는 「금천서원기(琴川書院記)」, 「횡천영당영건기(橫川影堂營建記)」, 「운암영당이건기(雲巖影堂移建記)」, 「운암영당기(雲巖影堂記)」, 「운암사사적기(雲巖祠事蹟記)」, 「운암강당중수기(雲巖講堂重修記)」 등의 목판으로 된 편액이 걸려 있다.

동재는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건립되었다. ‘기경재(起敬齋)’로, ‘화수헌(花樹軒)’ 및 ‘변사실(辨事室)’ 등과 함께 현판이 걸려 있다. 서재는 현판이 없으며, 동재와 같이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로 지어졌다. 운암영당 출입문은 문루 형식으로 ‘부양문(復陽門)’이라고 써 있는 현판이 걸려 있으며, ‘운암영당(雲巖影堂)’이라 새긴 현판을 걸어 놓아 이곳이 운암영당임을 알려 주고 있다.

[현황]

2011년 현재 운암영당의 소유자 및 관리자는 경주 최씨(慶州崔氏) 문중이다. 매년 음력 3월 10일에 경주 최씨 후손을 비롯한 지방 유림이 운암영당에서 향사를 지내고 있다. 운암영당에 봉안되어 있는 「운암 영당 고운 선생 영정」은 1979년 12월 29일 경상남도 유형 문화재 제187호로 지정되었다. 원본은 부산대학교 박물관에서 보관하다가 2009년 9월 29일부터 11월 29일까지 열린 국립진주박물관의 특별전 ‘지리산’ 이후 국립진주박물관에 기탁 보관 중이다.

운암영당에 추배된 「하동 운암리 최익현 영정」최익현의 44세 때의 모습을 복원한 영정이다. 2010년 10월 7일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513호로 지정되었는데, 문화재 지정 이후 도난 등의 문화재 훼손을 염려하여 원본을 국립진주박물관에 기탁하였다. 현재 운암영당에 있는 「운암 영당 고운 선생 영정」「하동 운암리 최익현 영정」은 모두 사본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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