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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3401808
한자 民衆-英雄-鄭起龍將軍
영어의미역 General Jeong Giryong Who Became the People's National Hero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경상남도 하동군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장원철

[개설]

하동이 배출한 역사적 위인 중 한 명인 매헌(梅軒) 정기룡(鄭起龍)은 1562년(명종 17) 당시의 곤양현(昆陽縣) 중평(仲坪), 곧 지금의 하동군 금남면 중평리에서 태어나 1622년(광해군 14) 삼군통제사로서 통영의 진중에서 죽었다. 정기룡이 임진왜란 당시 세운 전공에 대해서는 흔히 해전의 이순신(李舜臣)에 견주어 ‘육상의 이순신’이었다고 일컬어질 정도로 높은 평가를 받아 왔다.

18세기를 대표하는 학자 홍양호(洪良浩)가 『해동명장전(海東名將傳)』에서 말했듯이 정기룡은 “크고 작은 60여 회의 전투에서 언제나 소수의 병력으로 다수의 적을 무찔러 한 번도 패한 적이 없었다.”고 할 만큼 탁월한 무장이었다. 동시에 “정기룡이 가는 곳에는 백성이 한 명의 사상자도 없어 고을이 편안했으므로 백성들이 그를 존경하고 사랑하였다.”라고 평하듯이 전란의 시기에 목민관으로서도 뛰어난 행적을 보였다.

이러한 인물평에서 보듯이 정기룡은 임진왜란이란 국가적 전란을 맞이하여 탁월한 전술과 뛰어난 용맹으로 왜적을 물리친 명장인 동시에 백성들에게는 자애로운 목민관이었던 영웅적 인물로 인식·평가되어 왔다. 요컨대 나라와 백성을 전란의 위기에서 구해 낸 전쟁 영웅으로서 정기룡이순신이나 곽재우(郭再祐)와 달리 당시 지배 세력의 핍박과 질시를 받지 않았던 비교적 순탄한 생을 살았던 성공한 무장이었다. 동시에 지배층의 무능을 비판하던 기층 백성들의 시각에서 정기룡은 자신들의 편에 서서 백성을 진정으로 아끼고 보살피는, 따라서 자신들의 소망과 기대를 한껏 충족하는 성공한 민중적 영웅으로 회자되었다.

[정기룡의 세계(世系)와 출처]

정기룡의 생애에 대한 가장 신뢰할 만한 공식적 기록은 조정융(曺挺融)이 찬술한 행장을 바탕으로 1718년(숙종 44) 정기룡의 증손 정윤(鄭綸)의 요청으로 채휴징(蔡休徵)이 저술한 연보를 들 수 있다. 후에 이를 기초로 하여 정기룡의 행적을 정리한 『매헌실기(梅軒實記)』가 판각되었는데, 그 목판이 종가에서 전해 오다 현재는 경상북도 상주시의 충의사(忠毅祠)에 보관되어 있다.

『매헌실기』에 따르면 정기룡의 초명은 무수(茂樹), 자는 경운(景雲), 호는 매헌(梅軒)이며, 본관은 진양(晉陽)이다. 지금의 하동군 북천면 서황리 남포마을[옛 곤양군 난포마을]에서 세거해 오던 첨정공(僉正公) 정중공(鄭仲恭)의 15세손으로 태어났다. 그런데 정기룡의 집안에 대해서는 조선 시대 문헌에 대체로 ‘곤양인(昆陽人)’으로 표기되어 있어 일부에서는 곤양 정씨의 시조로 알려져 있기도 하다.

그러나 정기룡의 선조들을 살펴보면 정중공은 고려 시대 과거에 급제하여 첨정 벼슬을 지냈으며 진주 선천 난포(蘭浦)에 세거하였다. 이후 8대조인 정가원(鄭可願)도 조선 전기 생원시에 합격하여 벼슬을 역임하였다. 이들은 모두 난포에 세거하면서 지역의 팔대성(八大姓)에 꼽힐 만큼 성장했는데, 이 가운데 정확(鄭確)의 학식이 매우 뛰어났다고 한다. 문헌에 따르면 정기룡의 아버지 정호(鄭浩)는 숭록대부 의정부좌찬성 겸 판의금부사(崇祿大夫議政府左贊成兼判義禁府事)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실제로 역임한 관직이라기보다는 정기룡이 영달함에 따라 국가에서 추증한 것이며, 어머니는 남양 홍씨(南陽洪氏)였다고 한다. 이렇듯 정기룡의 가문은 그리 한미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연보에 따르면 정기룡은 19세 되던 1580년(선조 13)에 고성현에서 치러진 향시 무과에 합격하였다. 이는 당시 지역에서 화제가 되었는데, 지역의 대표적 가문이라는 평판 이외에도 무장으로서의 성장 가능성을 높게 평가받았기 때문이다. 24세 되던 해 정기룡은 진주의 향리 강세정(姜世鼎)의 딸과 결혼했다. 장인인 강세정은 당시 진주에서 가장 부유한 향리였다고 한다. 정기룡은 이렇듯 부유한 처가의 지원에 힘입어 1586년(선조 19) 25세의 나이로 무과 별시에 급제하였다. 이후 5년 동안 뚜렷한 관직을 받지 못한 채 지내다가, 임진왜란 초기 방어사 조경(趙儆)을 따라 군관의 지위로 임진왜란에 참전하게 되었다.

[임진왜란 중 정기룡의 주요 활약상]

임진왜란은 크게 3기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곧 전쟁이 시작되어 이듬 해 4월까지의 초기 전투기, 이후 일본군이 남해안의 연해로 물러나 명나라와 강화 교섭을 벌이다가 이의 결렬을 이유로 재침하는 1597년 2월까지의 강화 회담기, 마지막으로 일본군의 재침과 1578년 11월의 종전에 이르는 정유재란기의 세 시기가 바로 그것이다. 정기룡의 활약도 이러한 전쟁의 진행 시기와 맞물려 변화를 보이고 있는데, 그의 활약상을 시기로 나누어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1. 초기 전투기 : 1592년 4~10월

이 시기 정기룡은 주로 경상우도 지역의 전투에 참전하였다. 가장 먼저 정기룡이 참전했던 대표적인 전투로는 1592년 4월 23일에서 28일까지 벌어졌던 거창 추풍령 전투를 들 수 있다. 이 전투에서 정기룡은 경상우방어사 조경의 휘하에 돌격장으로 참가하여 어려운 전투를 감당하였다.

이후 정기룡은 1592년 10월 2일부터 10일까지 벌어진 진주성 부근 전투에 참가하고 있다. 이 전투에서 정기룡은 경상우도 감사였던 김성일(金誠一)에 의해 진주성 수성을 외곽에서 지원하는 유병별장에 임명되어 여러 전공을 세웠다. 이에 감사였던 김성일정기룡을 종8품 훈련원봉사에서 관직의 단계를 파격적으로 뛰어 넘어 종6품 상주가판관으로 임명하였다. 김성일에 의한 발탁과 승진은 이후의 전쟁에서 정기룡이 자신의 전략과 기량을 펼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 주었다고 할 수 있다.

2. 강화 회담기 : 1592년 10월~1597년 6월

이 시기 정기룡은 주로 상주 지역에서 활동하였다. 대표적인 전투로는 상주 용화동(龍華洞) 전투와 상주성 탈환 전투를 들 수 있다. 상주가판관에 임명된 정기룡은 부임하자마자 용화동 전투에서 혁혁한 전과를 올리는 등 능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이후 연보 상으로는 상주성을 탈환한 것으로 되어 있으나, 이 시기 정기룡의 활동은 일본군과의 전투보다 전쟁이 휩쓸고 지나간 폐허와 민심을 수습하는 데 역점이 두어졌다고 할 수 있다.

정기룡은 남하하는 명나라 군대의 접응, 피란에서 돌아온 상주목 백성들에 대한 구제 사업, 갑오년의 극심한 흉년 속에서 발호하는 도적떼에 대한 추포 등에서 두각을 나타내었다. 영남의 중심 고을인 상주 지역을 안정시킴으로써 장기전을 수행할 수 있는 기반을 구축하는 데 주력했던 것이다. 또한 한성에서 부산으로 이어지는 일본군의 교통로를 차단하고 보급을 압박하여 일본군이 더 이상 북쪽으로 진격하는 것을 막아 내는 역할에도 충실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정기룡의 공적을 인정하여 조정에서는 정기룡을 상주목사로 승진시키고, 수차례 다른 곳으로의 체임을 유보한 채 강화 회담기의 대부분의 시기를 상주목사로 지내도록 하였다.

3. 정유재란기 : 1597년 6월~1598년 종전까지

이 시기 정기룡은 주로 경상우도 지역에서 명나라 군과 합세하여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다. 정유재란이 발발하자 정기룡금오산성을 지키면서 목민관의 입장에서 지휘관으로 활약하게 되었다. 이 시기에 참전한 주요 전투로는 우선 1597년 8월 15일에서 16일까지 있었던 고령 용담현 전투를 들 수 있다. 다음으로 같은 해 9월 20일에 벌어졌던 보은 적암 전투가 있다. 이 전투에서 경상우병사의 지위로 참전했던 정기룡은 왜장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이끄는 대규모 일본군에 맞서 300여 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는데, 이는 정유재란의 국면 전환을 가져온 전략상 매우 중요한 전과로 평가받고 있다.

그 다음으로 1598년에 있었던 삼가현 전투와 같은 해 4월 20일에 있었던 함양 사근역 전투 등을 들 수 있는데, 이들 전투에서 정기룡은 주로 명나라 군과 합세하여 왜장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의 일본군과 맞서 전투를 벌였다. 이어서 마지막으로 같은 해 9월 17일에서 10월 1일까지는 명나라 군과 합세하여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죽음으로 인해 퇴각하려는 일본군에 맞서 사천성 전투를 벌였다. 비록 이 전투에서는 명군의 실책으로 패전했지만, 정기룡은 맹활약을 하여 자기 휘하의 병사를 온전하게 유지하여 퇴각하였다. 특히 이 시기 명나라 장수들로부터 능력을 인정받아 명나라 군대를 함께 지휘했는데, 이들이 선조에게 정기룡을 추천하기도 하였다.

임진왜란이 끝난 뒤 조정에서 전쟁 중의 공적을 세운 이들에 대한 선무공신(宣武功臣)의 책봉이 이루어졌다. 당시 정기룡은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1등에 참록되었다. 이는 실제 전장에서 활약한 지휘관으로는 박진(朴晉)의 뒤를 이은 것이며, 육전의 장수로는 곽재우·박의장(朴毅長)·박경신(朴慶新)·김태허(金太虛) 등이 정기룡의 뒤에 참록되었다. 아울러 정기룡은 사후에 상주의 충렬사(忠烈祠)에 제향되었고, 1773년(영조 49)에는 충의공(忠毅公)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설화 속에서 기억되는 정기룡의 형상]

역사적 행적으로 살펴본 정기룡은 임진왜란이라는 국가적 전란을 맞이하여 탁월한 전술과 뛰어난 용맹으로 왜적을 물리쳐 세상을 놀라게 한 명장이면서 동시에 전란이 끝난 뒤에는 백성에게 자애로운 목민관이었던 영웅적 인물로서 인식·평가되었다. 이러한 정기룡의 모습은 이후 실기(實記)와 전기(傳記) 속에서 문학적으로 형상화되기도 하고, 한편으로 민간에서 구전되는 이야기 속에서 민중의 영웅으로 형상화되어 여러 문헌 설화와 구비 설화에 걸쳐 두루 등장하게끔 되는 원동력으로 작용하였다.

한편, 설화 문학에 나타나는 정기룡의 인물 형상은 지배 계급의 충효 이념을 따르면서도 임진왜란 이후에 나타나기 시작하는 새로운 민중 의식을 일정 정도 반영하고 있다. 그러한 민중 의식이 투영된 결과로 설화에 나타나는 특징적 변이는 정기룡의 신분 및 이인의 능력을 지닌 후원자로서의 부인 이야기, 그리고 비극적이고 장렬한 죽음과 관련된 이야기 등을 들 수 있다. 예컨대 「정기룡 장군의 탄생과 명마」에서는 신통한 능력을 지닌 부인이 기르던 말이 정기룡이 전쟁에서 공을 세우는 데 큰 역할을 하고 있다.

신분과 관련된 변이 양상은 본래는 양반층에 속하는 정기룡을 관노나 하인 등의 미천한 신분으로 설정한 것은 자신들에게 보다 친근한 존재 또는 영웅으로 형상화하려는 민중 의식의 발로로 볼 수 있다. 아울러 선견지명을 지닌 이인으로서의 부인 이야기나 상주성 전투에서의 장렬한 최후를 맞이하는 죽음 등은 전쟁과 같은 현실의 위기를 겪으면서 자신들을 구원할 새로운 영웅의 출현을 기대하던 당시의 민중 의식이 투영된 결과로 볼 수 있다.

이렇듯 정기룡은 역사의 현장에서 개인으로서 세계와의 갈등을 전혀 겪지 않았으며, 그를 둘러싼 세계 역시 그가 개인적인 능력을 충분히 발휘하며 활동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 주었던 매우 드문 경우에 속하는 역사적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 결과 정기룡은 지배 계급에 의해 임진왜란을 승리로 이끄는 동시에 지배 계급의 통치 이념을 구현하는 전쟁 영웅으로 인식·평가될 수 있었다. 그와 같이 성공한 영웅으로서의 정기룡의 인물 형상은 이후 민중에게도 그대로 수용되는 한편, 새롭게 변화하는 민중의 소망과 기대를 반영하고 충족하는, 신이하고도 친근한 민중적 영웅의 모습으로 재창조되고 형상화되기에 이르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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