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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성산성 전투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3400270
한자 高城山城戰鬪
영어의미역 Goseongsanseong Fortress Battle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경상남도 하동군 옥종면 북방리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박용국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894년 10월 14일연표보기
종결 시기/일시 1894년 10월 14일연표보기
발생|시작 장소 경상남도 하동군 옥종면 북방리 고성산성지도보기
종결 장소 경상남도 하동군 옥종면 북방리 고성산성지도보기
성격 동학 농민군 항일 전투
관련 인물/단체 김인배(金仁培)[1870-1894]

[정의]

진주 지역 동학 농민군이 1894년 10월 14일 경상남도 하동군 옥종면 북방리에 있던 고성산성에서 일본군을 상대로 벌인 전투.

[역사적 배경]

봉건적 지배 체제하의 농민층은 여러 가지 수탈에 시달리는 가운데 1876년 개항 이후 제국주의의 경제적 침탈로 인해 삶이 더욱 피폐해지자 생존권을 위협받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여기에 더하여 동학이 교세를 확장하는 과정에서 탄압을 받게 되면서 동학도와 농민층이 반봉건, 반외세의 기치 아래 결집하게 되었다. 특히 진주 지역은 군정과 행정의 이중적 수탈로 인하여 1862년 진주 농민 항쟁이 일어났으며, 그 이후도 그러한 수탈의 구조를 벗어나지 못했던 곳이었다. 진주 농민항쟁이 시작된 수곡장터는 고성산성 전투가 벌어진 하동군 옥종면 북방리덕천강을 사이에 둔 곳인데, 여기서 불과 동학 농민운동이 일어나기 30년 전에 진주 농민항쟁을 도모하는수곡도회가 개최되었다.

[경과]

진주 지역의 시천면에 동학이 들어와 조직되기 시작하는 시기는 1893년 이전으로, 이 시기에 하동에서도 동학이 조직되었다. 1894년 1월 호남 지역에서 동학 농민군이 봉기하던 당시 하동 읍내에도 도소가 만들어져 동학도들이 활발한 활동을 하였다고 한다. 6월 하동부사 이채연이 민보군을 조직하여 동학도를 몰아냈던 것에서 잘 알 수 있다.

1894년 6월 일본군은 조정의 철수 요구에도 불구하고 궁성을 포위하여 고종을 협박하고, 청일전쟁을 일으키는 한편으로 내정을 간섭하는 등 국권을 침략하였다. 이리하여 전라도에서 제2차 동학 농민군이 봉기하였다. 이때 진주 지역에도 1894년 9월 광탄[너우니]에서 동학 농민군이 조직되어 봉기하였던 것이다.

진주·하동·곤양·남해·사천·단성 등지에서 모인 동학 농민군은 진주초차괘방(晉州初次掛榜)에서 “국가의 안위는 국민의 생사에 있고, 국민의 생사는 국가의 안위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찌 국가를 보호하고, 국민을 편안케 할 방도가 없어서야 되겠습니까.”라고 하면서 5,000여 명이 봉기하였다.

9월 1일 김인배(金仁培)[1870~1894]가 이끈 호남의 동학 농민군은 하동부사에게 쫓긴 하동 지역 동학 농민군의 안내를 받아 하동을 공격, 점령한다. 5, 6일 머물던 동학 농민군 일부는 호남 지역으로 돌아가고, 나머지는 총대장 김인배를 따라 진주로 향했다. 이와 거의 같은 시기에 진주 지역 곳곳에서 봉기한 동학 농민군이 광탄에 모여 기치를 올렸고 김인배의 동학 농민군은 9월 18, 19일의 대회를 마친 후 퇴거하기 시작하였다.

김홍집(金弘集)을 수반으로 한 친일 내각은 서부 경상남도 지역 동학 농민군의 소식을 접하자 대구판관 지석영(池錫永)을 토포사로 내정하고 그로 하여금 일본군과 협력해서 진주·하동 등지의 동학 농민군을 토벌하도록 하였다. 9월 25일 부산 주둔의 일본군 3개 소대 150명이 배편으로 창원의 마산포에 도착하고, 9월 29일 후지사카[藤坂] 소위가 이끄는 부대가 하동을 침략하였다. 하동의 동학 농민군은 일본군과 싸워 섬진강 서안으로 패주하였으나 이후 지속적으로 일본군을 괴롭혔다.

한편 10월 7일 일본군 제4중대장 스즈키[鈴木] 대위는 서부 경상남도 지역을 침략한 일본군을 총지휘하면서 지석영의 관군과 합류하였다고 한다. 이후 진주 지역의 동학 농민군은 스즈키 부대와 자주 전투를 벌였으나 그 내용이 자세하지 않고, 금오산 전투에서 크게 충돌하면서 이지가 서부 경상남도 지역에 파견된 일본군을 총지휘하기 위해 곤양에 도착하면서 대구에서 파견된 관군과 일본군의 합류가 이루어졌다.

이 무렵 동학군들이 여기저기서 출몰하고 있어서 일본군·관군과의 전투가 많이 벌어졌을 것으로 짐작되지만 자세한 것은 알 수 없다. 10월 10일 곤양 안심동 남쪽 금오산에서 동학군 400여 명이 일본군의 기습을 받아 70여 명이 전사하고 많은 동학 농민군이 사로잡혀 크게 세력을 잃었다.

10월 14일 수곡촌 산야에 흩어져 있던 진주 지역 동학 농민군은 일본군이 수곡촌으로 침략해 오자 일부는 고성산성으로 들어가 수성(守城)에 나서고, 일부는 시천면 지리산 방향으로 물러났다. 고성산성의 동학 농민군은 일본군이 공격해 오자 정상의 성벽에 의지하여 강력히 저항하였다. 시천 방면으로 물러났던 동학 농민군이 일본군 우측을 공격하였으나 신식 무기로 무장하고 전투 기술에서 월등한 일본군에게 패하여 지리산으로 후퇴하였다.

[결과]

1894년 10월 14일[양력 11월 11일] 진주를 중심으로 한 서부 경상남도 지역의 동학 농민군 5,000여 명은 재래식 무기로 무장한 채 고성산성에서 신식 무기로 무장한 일본군 1개 중대와 치열한 전투를 벌였으나 패퇴하였다. 당시 일본의 보고서에 따르면 186명이 전사하고 수십 명이 부상했다고 한다. 이 전투 이후 진주 지역 동학 농민군은 크게 세력을 잃었지만 지리산을 배경으로 끊임없는 저항을 이어갔으며, 다음해 을미의병으로 흡수되기도 했다.

한편 이때 전사한 동학 농민군은 인근 출신이 많았을 것이고, 그들 가족의 원한에 사무친 그리움이 고성산성에서 ‘고시랑, 고시랑’하는 원혼의 소리가 들린다는 설화를 낳았을 것이다. 이런 설화를 배경으로 하여 인근 사람들이 고성산성을 고시랑당, 고승산, 고승당산 등으로 불렀던 것이다.

[의의와 평가]

동학 농민군이 고성산성에서 치열한 전투 끝에 일본군에 패퇴했지만 새로운 사회로의 갈망을 담은 그들의 변혁의 기치는 19세기 초 이래 이 지역의 사회 변혁 운동을 촉발시킨 중요한 역사적 의의를 지닌다. 이 고장 출신 인사들은 고성산성 항일전적지보존회를 조직하고, 1995년 3월 22일 동학 농민 운동 100주년에 즈음해 동학운동위령탑을 세우고 해마다 고성산성 전투를 기념하는 위령제를 지내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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