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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산루기」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3400272
한자 海山樓記
영어의미역 Account of Haesanru
분야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유형 작품/문학 작품
지역 경상남도 하동군 하동읍 읍내리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김익재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저술|창작|발표 시기/일시 1726년연표보기
배경 지역 경상남도 하동군 금남면 노량리
성격 기문
작가 전천상

[정의]

경상남도 하동군 하동읍 읍내리에 있던 하동도호부의 삼문인 해산루의 기문(記文).

[개설]

1744년(영조 20) 하동부사로 부임한 전천상(田天祥)[1705~1751]은 자가 경문(景文), 본관은 담양(潭陽)이며, 1726년(영조 2) 무과에 급제하였다. 전천상이 하동으로 부임해 왔을 때, 하동도호부는 제대로 된 청사(廳舍)를 갖추지 못해 장소를 옮겨가며 공무를 집행하고 있었으며, 관리들 역시 정해진 거처가 없었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형세를 살펴보고 천혜의 요새라고 평한 적이 있는 하동이라는 전략적 요충지의 장점을 제대로 살리지 못하고 있는 것을 안타까워한 전천상은 기존의 그림을 바탕으로 규모를 산정하여 청사를 건립하였고, 그 청사 오른편에 지어진 누각이 바로 해산루(海山樓)이다.

해산루라는 이름은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바다와 산을 지키고자 했던 뜻을 되살리기 위해서 지은 것이기는 하지만, 해산루라는 이름의 누각이 하동에만 유일하게 있는 것은 아니다. 일반적으로 조선 시대 바닷가 고을의 삼문(三門)에는 ‘해산루(海山樓)’, 또는 ‘읍해루(揖海樓)’라는 이름을 붙이기도 했는데, 산을 끼고 있는 고을의 삼문에 ‘강산루(江山樓)’, 또는 ‘벽서루(碧棲樓)’라는 이름을 붙인 것과 비슷한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형태]

삼문이란 객사 앞에 세운 세 개의 문이 달린 통로를 말한다. 가운데 문은 수령이 이용하고 양쪽 문은 일반인들이 사용하였으며, 말을 탄 채 통과할 수 없는 곳이다. 지금도 ‘수령 이하 모두 말에서 내리시오[守令以下皆下馬]’라는 하마비(下馬碑)가 남아 있는 곳이 많다. 「해산루기」는 삼문을 세운 뒤 그 과정의 전말을 대략적으로 기록한 기문이다.

[특징]

하동은 삼면이 높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한 쪽은 바다를 끼고 트여 있으며, 섬진강을 끼고 경상도와 전라도의 중간 지점에 위치해 있다. 「해산루기」는 하동부사로 부임한 전천상이, 무관의 입장에서 본 하동의 지세와 천혜의 요새로서의 역할을 평가한 내용을 담은 기문이라 할 수 있다. 특히 “성을 쌓아 지키고 막아 섬진강과 함께 순치(脣齒)가 되게 하라”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견해를 인용한 것이 색다르다.

[의의와 평가]

무인 전천상이 하동이 가진 요새로서의 가치를 높이 평가한 것이 돋보인다. 또한 해산루 건립을 관부의 형태를 완성한 것으로 보지 않았고, 그 후로도 성곽을 쌓고 수비를 강화할 수 있는 대책을 세웠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자신의 건강이 여의치 않아서 임기 내에 그러한 임무를 완수하지 못할 것을 예측하고 후임자에게 일을 완수해 줄 것을 당부하는 내용이 있다는 점에서 애국 애민에 대한 그의 사상을 엿볼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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